■ 유락(YOORAK) 이창수 대표
미디어업계 종사 후 연고 없는 대구 내려와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으로 브랜딩 사업
40년 방치된 건물 문화공간으로 바꿔
영감 교류하는 다양한 프로젝트 기획
지난달 3일 대구 중구 향촌동 신세계콜라텍에서 열린 '대구 앙데팡당전'에서 관람객들이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여긴 춤추는 곳인데, 오늘 뭐하는 거예요?"
지난달 3일 개천절, 대구 도심 한복판에 '신세계'가 열렸다. 중구 향촌동에 위치한 신세계 성인 콜라텍. 트로트 음악이 나오고 미러볼이 돌아가는 무도장이다. 평소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춤추는 공간이지만, 이날은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전시 시작 전부터 좁은 골목에 전시장을 찾으려는 방문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콜라텍 앞에 청년들이 모여 있는 낯선 풍경에 지나가던 시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지난달 3일 '대구 앙데팡당전'이 열린 전시장 신세계콜라텍 내부.
회화, 조각, 현대무용 퍼포먼스….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이 살면서 가볼 일 있을까 했던 비일상적인 공간을 가득 메웠다. 전시명은 '대구 앙데팡당전'. 마르셸 뒤샹이 변기에 서명을 남긴 레디메이드 작품 '샘'을 출품했다가 거절당한 '뉴욕 앙데팡당전'을 오마주한 것이 모티브가 됐다. 당시처럼 출품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작가로 참여할 수 있어, 직업 예술가와 일반인 70여명이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주제는 '카르텔을 거부하는 카르텔'. 카르텔 밖에 있는 '비주류'들이 연대와 저항의 카르텔을 만들어보겠다는 취지다.
이 파격적인 프로젝트를 주도한 이는 누굴까. 어둑한 공간, 작품들과 사람들 틈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창수(37) 유락 대표. 연고 하나 없는 대구에 내려와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李有落)을 건 스타트업을 하고 있다. 이번 앙데팡당전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어쩌다 대구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됐을까. 최근 중구에 위치한 유락커피로스터스(동인동3가 271-120)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이창수 유락 대표.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유락커피로스터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스로 '비주류'라는 생각을 많이 해왔어요. 주류를 동경하면서도 거부감을 느꼈죠. 남들과 똑같은 길을 가는 게 멋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토마스 쿤의 정상과학 개념에 따르면, 비주류 이론이 계속 쌓여 임계치에 다다르면 그 비주류 이론이 주류가 되거든요. 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싶어요."
이 대표가 지향하는 삶은 앙데팡당전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늘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원래 신문기자였다. 2015년 세계일보에 입사해 경찰팀, 법조팀, 탐사팀, 문화부 등을 거치고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자살예방우수보도상, 만해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2021년엔 신문사를 나와 미디어 스타트업에서 개발자 겸 프로덕트 팀장으로 일했다.
미디어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건 실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스타트업 회사를 나왔을 때, 다시 신문사로 돌아갈지 고민했지만 곧 깨달았다. 신문사에선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힘들 거라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하려 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름으로 브랜드 만드는 일을 지금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이를 결심한 지 1주일 만에 할아버지가 생전 소유한 건물이 있는 대구로 내려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였다.
유락커피로스터스에 배치된 브라운관 TV.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이 대표의 마음이 적혀 있다.
"저에게 할아버지는 특히 각별한 존재예요. 언젠가 할아버지 이름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려 했는데, 그게 그때가 된 거죠. 유락이라는 이름이 '좋은 일 많이 한다' '참 멋있다'는 말이 오르내리는 브랜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구에 내려온 그는 동인동에 40여년간 방치돼 있던 할아버지의 건물을 고쳐 '커피'와 '경험'이라는 키워드로 되살렸다. 그렇게 유락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유락커피로스터스'가 탄생했다. 단순히 커피 팔기만을 하지 않는다. 프랑스 살롱처럼 다양한 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영감을 주고 받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기획해 '유락'이라는 낯선 이름을 기억에 남기고 재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모임을 기획해왔다. 모여서 각자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작업을 진행하고 감상을 나누는 '모각'이 대표적이다. 지금까지 밤샘 작업, 영화 보기, 글쓰기 등 다양한 주제로 모임이 이뤄졌다. '모여서 각자 글쓰기'의 경우 꾸준한 참가와 호응으로 벌써 시즌 6회째 진행하고 있다. 앞서 결과물로 참가자들의 글을 묶은 문고판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유락에서 기획한 프로젝트들의 포스터. 대구커피모닝클럽, 연탄 기부, 토요음감회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역사회에 따뜻한 나눔을 실천하는 프로젝트도 다수 진행했다. 지난해 12월 인근 카페들과 엽서를 판매해 그 수익으로 연탄을 기부했다. 총 797장이 판매돼 약 159만원의 수익이 모였고, 자원봉사자 30명과 함께 대구 동인동 일대 5가구에 가구당 300장씩 연탄을 직접 전달했다. 지난 4월엔 지역 청년 예술가와 함께 굿즈를 제작·판매해 수익금을 대구청소년창의센터와 산불피해 복구 모금에 기부했다.
이밖에도 △서울모닝커피클럽(SMCC)을 모델로 삼아 출근 전 모닝 커피를 마시며 교류하는 커뮤니티 '대구모닝커피클럽(DMCC)' △팝업 스토어 수익으로 청년 예술가의 시 한 편을 구매해 알리는 '시(詩) 삽니다' △특정 연도·주제에 맞춰 음악 1곡을 찾아와 다함께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토요음감회' 등 여러 문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유락커피로스터스 1층에 비치된 카세트테이프. 음악을 직접 골라 들을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구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유락커피로스터스 1층 내부. 곳곳에 브라운관 TV와 불상이 배치돼 있다.
카페 곳곳에 배치된 오브제들도 경험을 제공한다는 유락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먼저 카세트테이프와 플레이어를 비치해 음악을 직접 골라 들을 수 있게 했다. 알고리즘이 취향을 평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오래된 브라운관 TV와 불상은 비디오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대표작 'TV부처'가 모티프가 됐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유락의 철학을 상징한다.
이 대표는 이런 프로젝트들을 통해 서울에도 없는 문화를 대구에서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도시에 보다 활력이 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면 시도하기보다 검증될 때까지 지켜보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대구에 왜 내려왔는지 계속 생각하면서, 할아버지 이름으로 지속해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합니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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