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경 시인·대구문인협회 자문위원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에서 한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신라 금관 모형을 선물한 것은 시사한 바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황금을 유달리 선호하는 점을 고려하여, 한국 고유의 황금 유물인 금관이 최적의 선물로 낙점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APEC 이후 박물관 측에서는 시민들을 위해 '금관 특별전'을 실시했다. 전 세계 고대 순금 금관 13개 중에서 신라 금관 6개를 공개하는 것이다.
뉴스를 듣고 나는 밤잠을 설쳤다. 새벽 일찍 대구를 출발해 고속도로를 달리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주 터널을 지나 오른쪽 오봉산을 보니 천년 전 백제군과 신라군의 전투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고 선덕여왕의 전설이 깃든 여근곡(女根谷)이 이른 아침 수줍은 듯 옅은 안갯속에서 신비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경주국립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까마귀 떼가 박물관 공중을 휘돌며 환영 인사인지 경고인지 까악까악거리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입장 대기 번호표를 나누어줄 때 다행히 1차 관람 150명 속에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신라 금관 6점은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기에 제작된 국보로 조명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천년 전 지하에서 잠들어 있다가 화려하게 치장하고 때를 벗고 유리벽 속에서 빛의 조명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쉬운 점은 공기의 흐름을 넣어서 금박의 장식 잎들이 하늘하늘 움직여준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조각물이라도 정지된 아름다움보다는 생동감이 있어야 아름다움의 극치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는 시간 박물관 입구의 초대형 스크린에는 디지털 헤리티지 콘텐츠 '신라 천년의 울림'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천년의 세월을 넘어 경주에서 울려 퍼지는 선덕대왕 신종의 실제 타종 소리가 먼 서역까지 확산되는 순간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현한 영상 그래픽이었다. '황금의 도시'로 알려졌던 서라벌의 공간과 빛, 그리고 입체적 음향을 통해 천년 전 국제도시의 정신과 그 거대한 울림이 세계의 어울림으로 APEC 21개국이 함께 손을 잡는 순간이었으리라. 신종 타종 소리와 맥놀이 여운에 매료되어 멍하니 서 있노라니 졸시 '천년의 향기'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새봄의 젖꼭지를 물고 놓기 싫어/ 아지랑이 오르도록 시간을 끄는 것도/ 낯선 희열을 만나기 위함이지/ 연신 헐떡이는 여근곡의 봄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네/ 목탁 소리에 놀란 여근곡은 진달래꽃을 난산하고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