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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풍요로운 문화도시 산소카페 청송] 15. 심성지 선생과 소류정

2025-12-02 19:10

작은 德 쌓여 큰 德에 이르니…중용의 뜻 품은 소년, 의병장이 되다

청송 소류정은 고택들이 모여 있는 덕천마을 남쪽에 있다. 심성지 선생이 1885에 처음 세웠다. 심성지 선생은 1896년 청송의진 해산 이후 1904년 별세하기까지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양성과 학문에 매진했다.

청송 소류정은 고택들이 모여 있는 덕천마을 남쪽에 있다. 심성지 선생이 1885에 처음 세웠다. 심성지 선생은 1896년 청송의진 해산 이후 1904년 별세하기까지 이곳에 은거하며 후학양성과 학문에 매진했다.

"내 고장 지키는 것이 큰 덕" 뜻 품고

66세에 의병대장 맡아 항일투쟁

청송의진 해산 후 별세하기까지

후학 가르치며 은거하던 소류정

청송 유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스승에게 '중용'을 배우던 소년이 제30장 '소덕천류 대덕돈화(小德川流 大德敦化,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고 큰 덕은 만물을 두텁게 낳고 기른다)' 구절을 읽고,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문득 깨닫는다. 소년은 이렇게 묻는다. "이 구절이 제가 사는 마을의 모습과 잘 들어맞습니다. 그래서 덕천(신흥천) 위쪽에 작은 집을 지어 소류정사(小流精舍)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스승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좋은 생각을 얻었구나. 앞으로 더욱 열심히 노력해라"라고 답한다. 소덕천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자라난 소년이 훗날 청송의진 대장으로 추대되는 소류 심성지(小流 沈誠之, 1831~1904)이며, 스승은 그가 17세에 만나 가르침을 받은 둔와 류양흠(遯窩 柳養欽)이다.


심성지 선생이 소류라는 호를 갖게 된 경위를 알려주는 이 일화는 소년 심성지의 겸손함과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빈틈없는 성실함으로 성인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원대한 포부와 다짐이 깔려있다.


냇물은 흐르는 곳의 특성을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흘러가지만, 쉼 없이 만물을 적시며 흘러 결국 바다를 이룬다. '소류'라는 말에는 작은 것이 큰 것의 근본이 되고, 큰 덕을 이루는 길은 작은 덕을 쌓는 것밖에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돌이켜 보면 심성지 선생이 청송 선비들의 뜻을 받아들여 예순여섯의 고령에 의병대장으로 나서게 된 것도 내 이웃, 내 마을, 내 고장을 지키는 것이 천하의 큰 덕을 이루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소류정은 고택이 모여 있는 덕천마을 남쪽에 있다. 심성지 선생이 1885에 처음 세웠으며, 1896년 청송의진 해산 이후 1904년 별세하기까지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면서 학문에 매진했던 곳이다. 이후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에 중건했으며, 2012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은 국가지정문화유산이 아닌 문화유산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한 근현대 건축물, 시설, 기록 등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


현재 청송 지역의 국가등록문화유산은 소류정이 유일하다.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소류정은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으로 분류돼 있으며, 청송지방 정자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고 항일독립운동사적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청송 소류정 심성지사적비. 2003년 국가보훈지원사업으로 건립됐다.

청송 소류정 심성지사적비. 2003년 국가보훈지원사업으로 건립됐다.

청송 소류정 심정지 선생 사적비 옆에는 훈장증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장남 심능찬의 포장증,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선생의 고손자 심상기의 무공훈장증이 돌에 새겨져 있다.

청송 소류정 심정지 선생 사적비 옆에는 훈장증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장남 심능찬의 포장증,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선생의 고손자 심상기의 무공훈장증이 돌에 새겨져 있다.

소류정 입구에는 지난 2003년 국가보훈지원사업으로 건립한 선생의 사적비(事績碑)가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심성지 선생의 훈장증, 함께 의병활동을 한 장남 심능찬의 포장증,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선생의 고손자 심상기의 무공훈장증이 돌에 새겨져 있다.


심성지 선생의 가계를 되짚어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청송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1597년 울산의 도산전투에서 44세의 나이로 순절한 벽절공 심청이 있다. 그를 기리는 벽절정은 덕천리와 이웃한 청송읍 덕리에 있다.


청송의진의 운영과 활동은 일기식 진중 기록인 '적원일기(赤猿日記)'에 잘 기록돼 있다. '적원'이란 청송의진이 일어난 1896년 병신년(丙申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병(丙)은 붉은색이고 12지 동물의 9번째인 신(申)은 원숭이이므로 병신년은 적원 즉, 붉은 원숭이의 해가 된다.


적원일기에 따르면 청송의진은 양반유생들이 지도부를 구성하고 포병, 보부상, 농민들이 병사부로 편성돼 있었다. 병사부는 포병 100여명을 포함해 약 180명으로 적혀있다. 포병들에게 하루 1냥 5전의 급료를 지급하다 재정난으로 급료를 1냥으로 줄이자 포병들이 일제히 반발한 일도 기록돼 있다.


청송의진의 재정은 부호들에게 할당한 차출금, 각 문중에 배정한 문배금, 각종 자발적 의연금으로 마련됐다. 적원일기는 부호들이 차출금 납부가 지지부진하자 전령을 보내 엄히 독촉한 일, 지역의 제일 부자가 차출금 납부를 계속 미루자 향원들이 이를 비난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심정지 선생의 호인 소류는 중용의 소덕천류 대덕돈화(小德川流 大德敦化,)  즉, 작은 것이 큰 것의 근본이 되고, 큰 덕을 이루는 길은 작은 덕을 쌓는 것밖에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진은 청송 소류정 현판.

심정지 선생의 호인 '소류'는 중용의 '소덕천류 대덕돈화(小德川流 大德敦化,)' 즉, 작은 것이 큰 것의 근본이 되고, 큰 덕을 이루는 길은 작은 덕을 쌓는 것밖에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진은 청송 소류정 현판.

항일의병운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춘추대의, 위정척사 같은 이념적 측면을 먼저 떠올리지만, 적원일기는 그에 못지 않게 재정의 확보와 효율적 운용이라는 현실적 문제도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심성지 선생이 청송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그의 학덕과 명망이 높았기 때문일 터인데, 그와 함께 의병을 모으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또 청송지역 사림의 대다수는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이은 영남 남인계였으나 청송 심씨 가문은 서인계라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심성지 선생도 이러한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의병장을 맡아달라는 유생들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다양한 학맥으로 분화된 청송사림이 계파를 초월해 결속력 있는 의진을 구성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심성지 선생은 '강병론'에서 "청송의 형세가 작고 나약한데도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강대하기만을 꾀한다면 큰일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다"면서, "약함이 강함이 되고 작음이 큼이 되는 방법은 마음을 얻고 근본을 다스림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어릴 적에 마음에 새겨둔 소덕천류의 뜻을 의병활동에 적용해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고민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청송에서 유일하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소류정.  1997년에 중건했으며 2012년에 청송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청송에서 유일하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소류정. 1997년에 중건했으며 2012년에 청송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적원일기와 함께 청송의진 심성지 대장과 참모들이 병영에 모여 시를 한 수씩 지어 읊은 '영야음(營夜吟)' 10편도 문서로 전해진다. 대장 심성지와 도총 남승철의 시 두 편은 적원일기에도 기록돼 있다. 심성지 대장의 시는 1907년 후손들이 간행한 '소류선생문집'에도 '의영야음(義營夜吟)'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적원일기에 실린 시와 문집에 실린 시는 마지막 구가 서로 다르고 나머지 구에서도 몇몇 글자가 다르다. 병영에서 즉흥적으로 읊었던 시를 선생이 사후에 퇴고했고, 그것이 문집에 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항일의병기념공원에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놓은 '장위(將位) 심성지 영야음'은 1~7구는 문집에 실린 시와 같고 8구는 적원일기에 실린 시와 같다. 소류선생문집에 실린 '의영야음'은 다음과 같다.


긴 칼 들고 단에 올라 피로써 밝음 앞에 맹세 하노니(仗劍登壇 血誓明)


나라 걱정 한 마음으로 모이니 사람들이 성채를 이루었도다(同心憂國 衆成城)


오랑캐 우두머리 감히 천지를 뒤집으려 하지만(蠻酋敢爾 掀天地)


사람의 도리는 분명해 해와 별처럼 빛나도다(義理昭然 炳日星)


죽기는 가히 어렵지만 마땅히 죽음을 따를 수도 있고(死亦猶難 當事死)


살기는 비록 바라는 바이나 어찌 삶을 구걸하겠는가(生雖所慾 豈求生)


밤낮으로 생각하고 생각하느니 나라를 회복할 책무는 무겁도다(晝宵念念 重恢責)


한밤중 닭 울음은 불길하다지만 나에겐 나쁜 소리가 아니라네(惡惡荒鷄 非惡聲)


첫 구의 '밝음(明)'은 임금 혹은 태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마지막 구절은 '문계기무(聞鷄起舞)'라는 고사성어에서 따온 것이다. 새벽이 오기도 전에 닭이 울면 사람들은 불길하다고 여겼는데, 오랑캐의 침입이 잦았던 진(晉)나라 사람 조적은 한밤중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나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라면서 장검을 들고 무술을 연마해 뛰어난 장수가 됐다고 한다.


적원일기에 실린 시는 마지막 구절이 초나라 노랫소리로 초나라 군사들을 흩어지게 했다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서 따온 것이었다. 심성지 선생이 이 구절을 고친 것은 큰 뜻을 품고 빈틈없이 준비하는 진나라 조적의 성실함이 작지만 강한 청송의진이 되기 위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퇴고를 하는 소류선생이 중용의 그 구절을 버릇처럼 되뇌었을 수도 있겠다.


글=김광재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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