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영 수필가
김장은 배추도 맛있어야 하지만, 절임이 제대로 되어야 실패하지 않는다. 배추 절이기가 그만큼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양념까지 잘 만들어야 하니 김장 담그기는 참으로 어렵다.
김장하는 날, 절인 배추가 배달됐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속이 노란 배추가 소금물을 머금은 채 비닐에 곱게 싸여 있었다. 배춧잎 한 장을 떼어 입에 넣었다. 여태껏 먹어본 배추 가운데 이렇게 달고 고소한 맛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 "달고 맛있는 배추 잘 받았습니다."
아무런 기대 없이 뜻밖의 기쁨이 안길 때가 있다. 가을이 저물고 바람마저 스산하던 날, 군위를 지나던 길에 '화산마을'이라는 우람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산길을 따라 차를 몰아 오르니 아담한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마을은 화산산성이 있는 산꼭대기에 자리한, 옛 화전민들이 일군 마을이었다. 탁 트인 풍광 속에 오목한 구릉을 따라 집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오종종한 봉우리들이 발아래 펼쳐지고, 바람은 막힘없이 불어왔다.
마을 둘레를 걷다 보니 익어가는 과일과 고랭지 채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꼭대기 구릉지에 아담하게 펼쳐진 배추밭에서는 배춧잎이 기름을 바른 듯 반지르르 윤이 났다. 주민들은 겨울 채비로 분주했다. 어떤 이는 배추를 뽑고, 어떤 이는 절임을 하고 있었다. 절인 배추를 살까, 집에서 직접 절일까. 해마다 김장철이면 반복되는 갈등을 올해도 내려놓지 못한 채 날짜만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반지르르한 배추에 마음을 빼앗겨 절임 배추를 덜컥 주문하고 말았다.
배추를 주문하고 나니 일기예보에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평지도 아닌 산꼭대기 마을인데 괜찮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해 문자를 보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대요. 산꼭대기 배추밭은 괜찮을까요?" 나름대로는 최대한 완곡하게 쓴다고 썼다. 잠시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걱정을 먼저 만나지 마세요."
문자를 읽고 나니 걱정을 앞세운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그까짓 배추 몇 포기가 뭐라고. 그녀는 해마다 배추를 몇 트럭이나 절여왔을 텐데, 철없는 나는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밤새 나 자신을 소금에 절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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