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각예술가
외할아버지께서 영면에 드셨다.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에 가족들은 모두 대구로 내려와 장례를 치렀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외할아버지는 하얀 백바지를 즐겨 입으셨고, 중요한 날이면 늘 운동화 대신 구두를 고쳐 신으셨다. 목소리 또한 그 연세 못지않게 우렁차셨는데, 동네의 일흔 살 박씨 할아버지를 '박군 청년'이라 부르실 만큼 정정하신 분이었다.
외할아버지 댁은 대구 동구 신암동의 오래된 주택단지 중 한 곳이었다. 필자의 가족은 다른 외가 식구들보단 비교적 외할아버지 댁과 가까이서 지냈기에, 주말이면 자주 신암동을 찾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급한 일이 생기면 둘째 딸인 필자의 어머니에게 전화하셨고, 밭에 가는 날이면 사위인 필자의 아버지를 자주 찾으셨다. 작년 겨울, 외할아버지의 생신날 외삼촌과 가족들은 신암동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필자의 언니인 외손녀의 결혼식에 오실 수 있겠느냐고 묻자, 외할아버지는 "무슨 소리, 당연히 가야지" 하며 씩씩하게 답하셨다. 그날의 모습은 필자의 기억 속에 남은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외할아버지를 산소에 모시던 날은 1월의 겨울이라 느껴지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가족들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신 듯, 외할아버지는 봄날 같은 날씨에 외할머니 곁에 나란히 누우셨다.
필자는 작년 9월부터 신암동 외할아버지 댁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문 옆 작은 정원에는 직선으로 곧게 뻗은 왼편의 나무와 조금 더 작은 키로 오른편의 굽은 나무가 나란히 서 있다. 외할아버지 댁을 방문할 때마다 두 그루의 나무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필자를 반겨주는 듯했다. 필자는 외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또 이따금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눈에 담은 그 풍경을 120호의 큰 캔버스에 옮겼다. 평소 해오던 연작과는 또 다른 작업이라 계속해서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몇 달을 붙들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던 그림을,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돌아온 뒤에야 완성하였다.
가족들은 마지막으로 신암동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다시 볼 수 없을 신암동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으려 했다. 10년 전, 외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필자는 언젠간 다가올 외할아버지와의 이별에 겁이 많이 났었다. 더 많은 시간을 온 가족과 함께 보내려 했지만,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후회와 죄송함만 남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겹고 어렵다. 그럼에도 남겨진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기에, 지나가는 매 순간을 더욱 빼곡히 채우며 앞으로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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