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방만 개혁 공민왕 실패
‘실용’ 문종 때 고려 전성기
검찰 보완수사권 인정 필요
이재명 실용···원전 2기 신설
개혁 법안들 실리 따져봐야
박규완 논설위원
공민왕은 개혁주의자다. 정방(政房) 폐지, 노비·토지제도 혁신, 몽골풍 금지, 관제 복구, 정동행성 폐지 등 개혁을 추진했다.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과 왕권 강화를 포석했으나 결론적으로 개혁은 좌절됐다. 권신(權臣)의 반발, 조일신의 난 이후 부원(附元) 세력의 부상, 홍건적·왜구 침입에 따른 정세 불안이 발목을 잡았다. 조정(朝廷)의 역량 부족과 공민왕의 우유부단이 개혁 동력을 약화했다. '선택과 집중' 전략이 없었고 속도 조절에도 실패했다.
고려 11대 왕 문종은 실용주의자다. 조정(調整)과 협상의 고수였다. 천성이 현덕했으며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다. 양전보수법을 제정해 전세(田稅)의 과율을 공정화했다. 고려사는 "문종 시대엔 창고에 곡식이 쌓였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였으며 나라는 부유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경제성장률이 높았다는 의미로 읽힌다. 급진개혁이 아닌 실용의 성과다. 고려하면 창업자인 왕건과 광종, 공민왕 정도만 인구에 회자되지만, 기실 문종은 '고려의 세종대왕'이란 수식이 아깝지 않은 현군이다. 문종 재위 때가 고려의 전성기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탈이념, 탈진영, 탈정쟁의 현실적 실용주의가 우리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명분·대의에 매달려 국민 고통과 혼란을 가중시키면 개혁이 아니다"고도 했다. 섣부른 개혁으로 상황이 더 나빠진 사례는 차고 넘친다. 송나라 희녕변법이 그랬다. 희녕변법은 청묘법·시역법·균수법 등 농민과 중소상인을 지원하는 내용을 고루 담았다. 명실공히 친서민 정책이다. 하지만 희녕변법 시행 후 민생은 피폐해졌고 새 제도 도입에 따른 혼란이 가중됐다. 현장의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도외시한 시장 통제는 역시 무리수였다. 희녕변법의 실패는 '실용적 개혁'이란 역설적 좌표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검찰 개혁도 검찰의 보완수사권을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게 맞다. 검찰 권력 박탈은 수단일 뿐, 국민의 권리 구제와 인권 보호가 개혁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곳곳에 묻어난다.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해선 "열린 자세로 판단하겠다"고 했다. AI 시대의 폭발적 전력 수요, 문재인 정부 탈원전의 후과(後果) 등을 고려한 현실적 판단으로 여겨진다. 대통령이 신호를 보내자 정부는 곧바로 원전 2기 신설을 확정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 논란엔 "정부 정책으로 이미 결정해 놓은 것을 지금 뒤집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아쉬운 지점도 있다. 코스피 5000 달성에도 불구하고 실물경제엔 찬 바람이 분다. 지난 4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0.3%였고, 작년 연간 성장률도 간신히 1%에 턱걸이했다. 내수를 떠받치는 건설·설비투자가 부진했다. 고용지표가 좋을 리 없다. 지난해 12월 실업률 4.1%, 실업자 수는 121만명이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기업 활력 제고와 경제 체질 강화에 힘을 미치지 못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주 52시간제, 상법 3차 개정, 근로자 추정법, 노란봉투법, 중대재해법 등이 실용 정책에 부합하는지 톺아봐야 한다. 자칫 기업엔 족쇄가 될 수 있는 법안들이어서다.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의 괴리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실용은 성과로 입증해야 한다.
급진개혁을 추진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실패했고, 점진적 개혁의 중국 덩샤오핑은 성공했다. '흑묘백묘론'은 덩샤오핑 실용주의의 상징적 언어다. 이재명 대통령이 가야 할 길은 이미 자명하다. 논설위원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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