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21개국 정상 한복 제작…‘전통의 세계화’ 주역으로
2021년 4월17일 문을 연 상주 한국한복진흥원 전경. 진흥원은 국내 유일의 한복 전담 기관으로 관련 행사를 진행하고 전문인력도 길러낸다.
한국한복진흥원 전시홍보관 메인홀
우리옷 100선 선정 원형의 기록과 재현
한복놀이터·한복입는 날 등 일상화 앞장
경북한복문화창작소 운영 산업화 모색
한복산업진흥법 통과 도약 기반 갖춰
경북 상주 함창읍에서는 한때 전국에서 가장 고운 비단이 났다. 뽕나무가 자라면 누에가 먹었고, 누에가 고치를 지으면 그 속에서 실이 풀려 나왔다. 쌀과 누에고치와 곶감, 세 가지 흰빛으로 풍요로웠던 삼백(三白)의 고장 상주의 세 축이다.
그 오래된 땅에 한국한복진흥원(이하 진흥원)이 뿌리를 내렸다. 국내 유일의 한복 전담기관이다. 2021년 4월17일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다섯 해.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 사이 2010년 3천737개였던 한복 업체는 2024년 1천668개로 줄었다.
한국한복진흥원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27점 속에서 한복은 물론 갓과 망건의 내력을 읽어냈다. 사진은 한국한복진흥원 인생이야기관에서 전시 중인 김홍도 평생도 중 회혼례 재현 모형.
◆사라지는 것을 붙드는 손
2022년 진흥원은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한복 100벌을 선정했다. 국내 최초의 '우리 옷 100선'이다. 2025년, 궁중복식 다섯 벌이 실물로 되살아났다. 전시홍보관 영상관에는 영조의 곤룡포가 흐른다. 고종의 12장 면복이, 철종의 구군복이, 왕실 여인의 예복이 화면 위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한복을 되살리는 일은 흙 속에서도 이어진다. 무덤에서 나온 옷을 다시 짓는 작업이다. 2024년에는 '전통복식연구회 소색(素色)'과 함께 고성이씨 응태묘 출토복식을 재현했다. 2025년에는 이명여 묘로 손길이 옮겨갔다. 17세기 전반의 사계화문 장저고리와 운용문 치마. 직물의 결과 밀도를 읽고, 문양과 색을 좇고, 솔기 하나하나의 바느질을 다시 따라갔다. 옛 옷을 그저 흉내 내는 게 아니라 한 땀의 방향을 기억하는 일이다. 한 번 사라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을 오늘의 손끝으로 끝내 붙드는 일이다.
한복은 저고리와 치마, 도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자와 신발, 장신구가 있다. 선비는 길을 나설 때 '의관정제'한다. 옷을 갖추고 관을 쓴다는 뜻이다. 조선은 그렇게 '모자의 나라'라 불렸고, 그 솜씨가 세계적이었다. 진흥원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27점 속에서 갓과 망건, 탕건의 내력을 읽어냈다. 그림 한 점이 사료가 되고, 사료가 다시 상주의 정체성이 됐다. 해마다 열리는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이 그 증거다. 내년에는 전국 전통 모자 전수조사도 시작한다.
우리 옷 100선, 출토복식 재현, 전통모자 연구. 길은 달라도 한국한복진흥원의 가는 방향은 하나다. 중심을 먼저 단단히 하고, 그 위에서 창의를 허락한다. 원형을 정확히 기록해야 현대의 해석도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믿음이다.
상주 한국한복진흥원 영상관 궁중복식 실감형 미디어아트. 영조의 곤룡포, 고종의 12장 면복, 철종의 구군복, 왕실 여인의 예복이 화면에 나타난다.
상주 한국한복진흥원의 어린이 한복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한복을 입어보고 즐길 수 있다.
◆한복은 즐거운 것
한복이 낯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입는 법을 모르고, 어릴 적 입어본 기억이 적고, 일상에서 마주칠 일이 드물다. 진흥원은 이 거리를 교육으로 좁혀간다.
어린이 한복놀이터가 그 시작이다. 2024년 7월에 문을 열고, 2025년 11월에 새 단장을 했다.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마음껏 뛰노는 곳. 저고리를 처음 걸쳐본 아이의 눈이 동그래진다. 학교를 직접 찾아가는 한복문화교실도 있다. 역사를 듣고 직접 입어보고, 고름 매는 법을 손에 익힌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한복 입는 날이다. 어른들이 한복을 걸치고 고름을 맨다. 장롱 깊이 잠들어 있던 한복은 무상 수선을 거쳐 다시 거리로 나온다. '한복한 네트워킹데이', '한복모꼬지'처럼 함께 입고 나서는 자리도 늘었다. 한복이 더는 '입어야 하는 옷'이 아니라 '입고 싶은 옷'이 되는 시간이 된다. 그런 순간들이 조용한 내륙 도시 상주에 차곡차곡 쌓인다.
기술을 잇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기초 바느질부터 패턴, 창작 디자인까지 세 단계로 가르친다. 2026년에는 국가무형유산 침선장 보유자를 모셔 도포와 장의 짓는 법을 전한다. 구혜자 침선장 보유자가 이끄는 관례전에서는, 조선시대 왕세자와 사대부의 성년식 옷을 만날 수도 있다.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전통은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상주 한국한복진흥원 입주업체 상품 전시 판매장에서는 이 시대의 한복을 만날 수 있다. '입어야 하는' 한복이 아니라 '입고 싶은' 한복을 만드는 이들의 노력이 여기에 있다.
◆상주에서 세계로
진흥원은 전통만 지키는 곳은 아니다. 이곳에는 한복이 태어나는 작업장이 있다. 13억원의 예산을 들여 2023년 2월 문을 연 '경북한복문화창작소'다. 샘플 제작부터 패턴, 재단, 영상, 라이브 커머스 촬영까지 맡는다. 디자인에서 제작, 창업, 판매로 이어지는 단계가 한자리에서 이뤄진다. 레이저 절단기와 스마트 자수기 같은 장비가 손맛을 거든다. 전통을 지키되 달라진 세상에는 응답하겠다는 다짐이다.
혼자라면 버거웠을 일을 함께 해내는 사람들도 있다. 진흥원에 자리 잡은 13개 한복 기업이다. 1인 창업자부터 작은 회사까지, 작업실과 장비를 나눠 쓴다. 이들이 뭉쳐 만든 협업 브랜드가 '누미한'이다. 지난해에는 판매·체험관을 열었고, 올해는 국립경국대학교와 손잡고 전통문화상품을 개발한다. 위축돼 가는 시장에서 혼자서는 닿을 수 없던 자리에 함께 손을 뻗는다.
청년과 전통 디자이너가 한자리에 모이기도 한다. 올해로 3년째인 '한복창작해커톤'이다. 전통의 구조 위에 오늘의 감각을 얹는다. 세대를 가로지르고 분야를 가로질러, 한복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2025년, 진흥원의 5년이 가장 환하게 빛난 순간이 왔다.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다. 진흥원은 21개국 정상을 위한 기념 한복을 지었고 패션쇼를 열었다. 세계의 눈이 경주로 모인 그날, 월정교 위에서 한복이 빛났다. 진흥원이 5년간 연구하고 기록하고 되살려온 모든 것이 그 한 벌에 담겨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신라복을 모티브로 한 옷을 입었다. 새 원단부터 디자인까지 한복이 갈 새 길을 가리키는 옷이었다.
상주세계모자페스티벌에서는 주한 외교사절단이 직접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한복이 외교의 언어가 되는 순간이었다.
박후근 원장은 "APEC 한복패션쇼와 신라복 유니폼은, 국내 유일 한복 전담기관으로서 우리의 존재 의의를 세계 앞에 증명한 성과"라고 말했다. 5년의 연구와 10억 원이 넘은 프로젝트였다. 그 시간과 한복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 무대도 없었을 것이다.
한국한복진흥원은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을 위한 기념 한복을 만들고 패션쇼를 열었다. 자원봉사자들도 신라의 복식을 모티브로 한 옷을 입었다. 사진은 한국한복진흥원 한복명품관.
◆실 한 올이 모여
다섯 살인 진흥원은 아직 어리다. 그러나 남긴 자취는 그 숫자를 훌쩍 넘는다. 5년 동안 64억원을 들여 APEC 한복과 세계모자페스티벌, 해커톤, 출토복식 재현, 전문인력 양성을 해냈다. 그리고 2026년 봄, 한복문화산업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복을 국가가 떠받치겠다는 약속이 처음으로 법에 새겨졌다. 내년 법 시행을 앞두고, 올 연말까지 다섯 차례의 토론과 세미나가 이어진다.
한복은 박물관에 갇힌 옷이어선 안 된다. 살아 숨 쉬는 문화여야 한다. 그러려면 연구하고, 기록하고, 가르치고, 입는 일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지난 5년, 진흥원이 해온 일이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의 5년에도, 그 너머 10년에도 길은 이어질 것이다. 실 한 올이 모여 한 필의 천이 된다. 한 해 한 해가 쌓여, 오천 년 한복의 내일이 된다.
글=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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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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