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희란 계집이 기밀을 빼내다 들켜 난리가 났네…어허 말세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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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우륵박물관에 있는 우륵기념탑. 12현의 가야금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우뚝 솟아 있다. 가실왕은 음악을 통해 천하를 통일하고, 부흥하며, 하나로 화합되길 원했다. 우륵이 제작한 가야금은 그런 대가야의 얼과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륵은 그 꿈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
#1
우륵은 가실왕이 특별하게 하사한, 금칠이 잘 된 가얏고를 무릎에 얹고 줄을 쓰다듬는다.
“이문아, 이 가얏고는 이제 나의 전부가 되었다.”
“저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그래, 우리의 전부이니라. 왕께서 그걸 인정하셨다. 왕께서는 이 가얏고를 통해 천하를 통일하고, 부흥하며, 하나로 화합되길 원하신다. 그 중한 일이 나의 일이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는 대가야의 소리로 통일되리라.”
“충분히 그럴 만한 악기입니다.”
“가야제국의 소리를 다 표현할 수 있다. 얼마나 장한 악기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었지요. 스승님은 이 악기와 더불어 길이 이름이 기억될 것입니다.”
우륵은 ‘상가라도’를 연주한다. 대가야의 꿈이 무르익은 농현으로 다시 한 번 질펀하게 펼쳐진다. 가야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은 정현모주로부터 피워온 대가야의 꿈은 큰 강을 따라 내려갔고, 그 물결의 힘은 사방으로 뻗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대가야는 큰 강 양안의 제국들은 물론, 서쪽으로도 한껏 영향력을 발휘하여 대제국의 꿈을 실현해 왔다. 비록 지금은 그 힘이 약해졌으나, 왕의 개혁이 보장되는 한 다시 한번 대가야는 넓은 강토를 그 품에 안으리라. 그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가얏고 소리가 그 품을 그윽하게 할 것이다. 우륵은 그 꿈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2
(대화1)
갑 : 어허, 왕이 가얏고에 미친 게 아닌가?
을 : 가야 각국의 악사들을 불러 가얏고를 교육하고 연주할 집을 크게 짓는다니,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한담? 국고가 꽉 찼을 때도 하기 힘들었던 생각을, 가야 각국의 봉물이 현저히 줄어들어 국고가 비어가는 지금에 어찌 그런 사업을 벌여?
갑 : 음악으로 가야제국의 마음을 통합한다고? 어림없는 꿈이야.
을 : 그보다는 빨리 백제와 동맹을 강화하여 자꾸 우리를 넘보는 신라의 속셈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인데, 악기 타령만 하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은가?
갑 : 우륵이 너무 설쳐대는군. 왕의 힘을 믿고 저러다 큰 일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을 : 쉿! 우륵이 신라와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니 말 조심하게.
갑 : 그렇잖아도 그의 친구가 신라의 첩자라네.
을 : 그게 무슨 소린가?
갑 : 그 판수라는 작자 있지? 포구에서 연주하는 그 젓대쟁이….
을 : 그 친구가 첩자라고?
갑 : 그렇다네. 그 친구가 제자를, 우륵 옆에서 가얏고를 연주하던 그 계집 말일세, 궁성에 잠입시켜서 기밀을 빼내다 들켜 난리가 났네.
을 : 그래, 잡혔는가?
갑 : 판수는 달아나고, 그 계집은 감옥에 갇혔다네.
갑 : 어허! 말세일세.
을 : 그래봤자 왕이나 우륵이 신라편이니 흐지부지되겠지.
갑 : 어허, 말세일세.
#3
(대화2)
왕 : 음악으로 제국의 마음결을 가지런히 하려는 나의 뜻이 지금 꼭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수긍하지 못하고, 말들이 많은지…. 사람들의 마음이 왜 이리 헝클어졌나?
우륵 : 전하, 판수의 일은 정말 유감이옵니다. 혹여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걸림돌이 될까 민망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왕 : 그럴 것 없네. 첩자는 지금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네. 가야 제국들이 백제로 기울어지면서 신라와 백제의 첩자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네. 판수도 그 중 한 사람일 뿐이지. 그가 유출한 정보라는 것도 별 게 아니고. 다만 백제와 신라에서 그런 첩보와 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걸 경계해야 할 뿐. 짐이 크게 마음쓰고 있지 않으니, 자넨 그 일을 잊고 가얏고를 잘 챙기시게. 새 곡들을 널리 펴고, 악기를 고루 전파시키는 일이 자네의 일일세.
우륵 : 잘 알고 있습니다. 가얏고는 제 필생의 반려입니다. 이 악기를 지키는 게 대가야의 정신을 지키고 간수하는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왕 : 당연하지. 자네의 일은 나의 개혁추진의 기반임을 명심하게.
우륵 : 잘 알겠습니다.
왕 : 앞으로 많은 장애가 있을 것이네. 그걸 이겨내야 하네.
우륵 : 네, 전하. 하옵고, 보희의 일은 어찌 처리하시렵니까?
왕 : 보희?
우륵 : 불쌍한 아이입니다. 재주가 아주 놀라워 앞으로 가얏고 음악을 지켜낼 훌륭한 재목감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판수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마도 스승이 시키는 일이라 그냥 생각 없이 한 것 같습니다. 선처가 가능하겠는지요?
왕 :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게.
#4
“보희가 탈출했다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간수들이 잠든 사이에 지붕을 뚫고 사라져버렸어.”
“약을 타서 간수들을 먹인 모양이네.”
“한밤 중에 약주를 들인 사람이 판수패라던데. 잘 봐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걸 들이민 게야. 간수들이 그걸 한 잔씩 나누어 마신 다음 잠들어버렸어.”
그런 말들이 무성하다.
우륵은 아침에 궁성에 들렀다가 바로 공방으로 돌아온다. 이문은 그를 맞이하면서 눈치를 살핀다.
“공기가 어떻습니까?”
“심각하네. 한 차례 책임 추궁이 일 듯하네. 포구에 군사들이 급파됐다는데, 모두 도주해버렸다더군.”
“어쨌든 잘 된 일입니다.”
“입 다물게. 자네가 도운 일이라는 걸 아무도 모를 게야.”
“포구 출입은 당분간 삼가십시오. 혹, 판수의 끄나풀이 접근해올지도 모르니까.”
“알겠네. 조심하세.”
며칠 후 우륵이 돌아오는 길에 한 길손이 그를 스치면서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중얼댔다.
“알터 위 성 아래 고개에서, 해질녘에 판수님이 기다립니다.”
우륵이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수염이 무성해서 얼굴이 어둡다. 우륵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휑하니 들길로 해서 내쪽으로 가버린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일찍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먹을 것과 술 한 병을 싸서 허리에 찬 다음에 우륵은 서둘러 길을 나선다. 가얏고를 어깨에 멨다. 때로 무작정 주변의 산천을 돌아다니던 차림이다. 섶다리로 강을 건너 모래밭을 따라 강 하류로 내려가다가 산성 쪽으로 향한다. 알터를 지나 좁은 산길로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침소리가 들린다. 길을 벗어나 바위 뒤로 돌아가니 판수가 서 있다. 판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좀 더 깊은 골짜기로 그를 안내한다. 골짜기 바위 아래 둘은 앉는다.
“저녁이나 들게.”
우륵은 싸온 주먹밥과 간단한 반찬을 펴놓는다. 술부터 한 잔 권한다. 판수는 얼른 한 잔 하고는 우륵에게 표주박 잔을 내민다.
“보희는?”
“큰 강 건너 있네. 고맙네. 괜찮은가?”
“괜찮을 리 있나, 이 사람아. 사람들이 날 의심하는 듯해.”
“꼬리가 잡히지 않게 조심하겠네. 이거, 보희가 전해주라 했네. 보희에겐 베낀 게 한 권 있네.”
악보를 그려놓은 책이다. 우륵이 작곡한 열 두 곡과 이문이 작곡한 세 곡을 그려놓은 것인데, 보희가 늘 챙기면서 베끼고 있었다. 아주 귀한 것이다.
“왕이 추진하는 개혁의 반대세력이 만만찮을 텐데. 자네가 걱정이 되는구먼.”
“나야, 가얏고를 지키면서 살아야지. 음악이나 하는 악사에게 무슨 큰 일이 있겠나?”
“아니야, 틀림없이 자넬 해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걸세. 자넨 친신라계가 아닌가. 궁중에는 친백제 세력들이 득실거리네.”
“그래, 왕만 강건하면 잘 풀릴 거야. 나는 가얏고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할 걸세.”
“잘 해보게. 가보겠네. 서라벌로 갈 거야. 밥은 가면서 먹겠네.”
판수는 일어선다. 우륵은 그에게 가얏고를 내민다.
“보희에게 전해주게.”
판수는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숲으로 해서 산 아래로 사라진다. 우륵은 어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산길로 나와 알터로 내려온다. 달이 없어 사위가 어둡다. 글=이하석
<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 기획 <고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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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에 있는 금장지 표지석.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연주하던 자리에 세워졌다. <영남일보DB> |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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