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이 말했다 나 역시 새 정책을 펴려하오 그대가 도와주길 바라오
감격에 몸을 떨며 우륵이 말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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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우륵박물관에 있는 신라시대의 토우(흙으로 만든 인물상).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1
강을 건너고 나서야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모래벌판을 지나 낮은 언덕을 넘자, 숲 언저리에서 피어나는 모닥불의 불빛이 보인다. 판수가 마중을 나온다. 우륵은 판수의 손을 잡는다.
“무사히 건너왔군. 잘 왔네.”
“노인과 어린애들이 있어서 좀 지체되었네.”
“마침 달도 없고 해서 강 건너기 딱 좋은 밤이네. 자, 짐 내려놓고 모닥불 가에 모이세. 간단히 요기할 걸 마련했네.”
“고맙네.”
불가에 둘러앉은 이들은 별 말이 없다. 생각보다 따라붙은 이들이 많은 탓에 둘러앉으니 통솔이 만만찮음을 느낀다. 몇몇 대신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끓여놓은 국을 나누고, 밥도 내온다. 더러 준비한 주먹밥을 챙겨 먹기도 한다. 소 두 마리가 어둠 속에 서 있다. 뒤에 달구지를 단 걸 보니 짐을 싣고 갈 모양이다. 낯선 사람들도 보인다.
“준비를 많이 했군. 참으로 생광스럽네.”
“아니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
판수는 낯선 사람들을 턱으로 가리킨다.
“저 사람들이 안내를 할 걸세. 어린애와 노인들 때문에 더딜 수밖에 없어서 서라벌로 가려면 한 사흘은 걸리겠네. 오늘밤은 저기 산 밑에서 묵고, 내일 일찍 떠나세.”
그렇게 신라행이 시작된다. 제법 긴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는 더러 구경꾼들이 나와 있다. 집 떠난 이들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교차되는 얼굴이다. 대신 가운데 일부는 서라벌에 아는 이를 찾아서 기댈 데가 있을지 안내자들에게 연통을 넣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사흘 뒤 그들은 서라벌의 도성 앞에 다다른다. 모두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다. 성 밖 너른 터에 짐을 풀고, 성 안의 소식을 기다린다. 그새 소문을 듣고 달려온 친지들이 사람을 찾아 반갑게 맞는 모습도 눈에 띈다.
#2
그러나 도성 안으로 드는 문은 비좁다.
몇 사람의 관리들이 드나들더니 드디어 결론이 난 게 다시 먼 길을 떠나라는 거다. 서라벌을 떠나 다시 멀리 고구려와 접경인 국경지역, 곧 국원(國原·오늘의 충주지역)으로 소개된다는 게다. 금관가야 등 가야 제국이 신라에 복속되면서 서라벌로 영입되는 가야인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바람에 신라 조정은 이들을 도성 안에 수용하기가 아주 난감한 상태인 데다, 가야인 수가 많아지게 되면서 발생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차단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그래서 가야 유민을 일률적으로 국경지역으로 소개시킨다고 한다.
우륵은 기가 막힌다. 판수에게 항의를 해보지만, 판수 역시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다.
“우선 자네 식구들이라도 우리 집에 기거하면서 며칠 동안 추이를 봐야 할 것 같네. 궁성의 관리와 계속 자네 문제를 논의하고 있으니 며칠만 참게.”
“이 사람아. 나는 망명을 한 것이네. 어찌 대접이 이러한가?”
“가야 유민들이 많아지니 아주 혼란스러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조정의 말일세.”
우륵은 판수와 함께 신라 조정에 여러 줄을 넣어봤지만, 결국은 국경지역으로 가는 수밖에 없음을 안다. 신라의 임금은 아직 성년이 채 되지 않아서 국정은 왕태후의 섭정으로 조정 대신 가운데 유력한 이들이 꾸려가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가야의 악공 하나가 왔다 해도 누가 관심을 가져줄 리가 없다. 신라에서는 아직 가얏고의 중요성을 모르니 우륵에 대한 태도도 특별할 리가 없다. 가라는 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라 조정의 결정을 번복할 명분이 없으니 결국 국경지대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는 금관가야 출신의 김무력 장군이 도독으로 식읍을 하사받은 곳이라, 비교적 가야 유민들간의 소통이 잘 이루어져 숨을 쉴 만한 곳이라고 모두 자위한다. 척박하긴 하나 농사지을 땅이 주어진다니. 아무렴, 입에 풀칠이라도 못하랴 하고 여길 뿐이다. 대가야에 남아 있었으면 체포되어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 만한 정도라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게다. 우륵과 이문의 가족들은 다시 먼 길을 걷는 고달픈 행군을 한다.
#3
고국 대가야의 암담한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모든 소식이 점점 절망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자주 우륵을 찾아와 유일한 고국의 소리인 가얏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고달픈 삶을 달래고, 고국에서의 삶을 그리워해온 가야인들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국원을 휘감아 흐르는 강 언덕에서 우륵은 슬픈 심정으로 가얏고를 연주한다.
“그래, 내가 지킬 것은 이 가얏고뿐”이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때때로 가얏고를 만드는 일을 함께 한 가실왕이 떠오른다. 그의 개혁에 기꺼이 동참한 것은 우륵 자신의 재능을 아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가야의 통합을 원했고, 그리하여 대가야의 큰 포부를 펼치려 한 일에 우륵의 음악을 중심에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실왕이 죽자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만 가얏고만 남았을 뿐이다. 가얏고만이 이제 가야의 소리와 꿈을 떠올릴 유일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가얏고를 지켜서 대가야의 음률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얏고는 대가야의 꿈과 정서를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는, 대가야가 만든 유일한 악기인 것이다.
우륵은 이문과 함께 가얏고를 제작하는 공방을 새로 연다. 자주 강가에 나가 연주를 한다. 그의 소리를 안고 출렁이는 물이 깊고도 아득하게 흐르는 걸 느낀다.
#4
진흥왕이 국원을 순수(巡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어린 왕이 그새 훌쩍 자라 성년이 되자, 비로소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선포했는데, 그 왕이 낭성 등 지금의 남한강 유역에 새로 신라에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야심만만한, 젊은 패기를 드러낸 것이다. 그 왕이 우륵을 기억해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승님, 낭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임금님이 부르십니다.”
이문이 전갈을 전하자, 우륵은 놀란다. 황급히 달려가 왕 앞에 엎드린다.
“그대의 소문은 익히 들었소.” 왕은 가얏고를 유심히 살핀다. “이게 가얏고로군. 나를 위해 연주를 해 주오.”
왕이 가얏고를 기억하고 있었고, 우륵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우륵은 가얏고를 연주한다. 국원에 와서 작곡한 곡들이다. 실은 나라를 잃은 심정이 절절하게 우러나는 곡조지만, 진흥왕은 퍽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이오. 그래, 그대가 가실왕을 도와 음률의 개혁을 주도했음을 아오.”
“황공하옵니다.”
“나 역시 이제 새롭게 나의 정책을 펴려하오. 도와주길 바라오.”
우륵은 새삼 왕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 무슨 벼락같은 소리인가. 신라왕이 가얏고의 존재를 아는 것 이상으로 인정해주다니 말이다. 진흥왕은 오랜 섭정을 벗어나 이제 막 주체적으로 국정을 펴기 시작하면서 그 체제를 바꾸려는 의욕에 차 있다. 그 체제변화 가운데 하나가 음률의 재정비임을 넌지시 암시해준 말이 아닐 수 없다. 가얏고의 음률이 그러한 왕의 구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음을 간파한 게다. 왕이 우륵을 낭성으로 부른 것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일으키려는 구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이 지역으로의 순수가 결정되면서부터 우륵을 만나려고 결심한 것임이 분명하다. 우륵은 감격에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서라벌로 왕이 돌아간 직후 왕은 세 사람을 보내 가얏고를 전수하게 한다. 대나마(大奈麻) 주지, 계고, 그리고 대사(大舍) 만덕이 그들이다. <계속>
글=이하석
<시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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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에서는 가야금 이외에도 거문고, 아쟁, 해금 등 다양한 전통악기를 살펴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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