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겸진경(淸謙眞景)= ‘청하’와 ‘겸재’의 줄임말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뜻한다
“진경은 조선 사람이 음미할 수 있는 맛까지 담아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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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오에게 화론(畵論)수업을 약속했던 선(겸재 정선)은 신유한, 최천익, 세오, 그리고 경주기생 월섬과 함께 진경산수를 화두로 깊이있는 논쟁을 벌인다. 그러던 차에 신유한은 선에게 내연산을 소재로 진경의 화두를 가다듬을 것을 제안한다. 포항 내연산 관음폭포의 만추 풍경. 겸재가 청하에 머물며 완성한 ‘내연삼용추’의 작품 배경이 된 곳이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선(敾)은 눈을 감고 멀리 한성의 옥인동 본가를 떠올린다. 탕약(湯藥)을 달이고 있는 아내 연안송씨. 그 뒤로 두 며느리가 들락거리는 부엌 풍경. 장자 정만교(鄭萬喬)는 서른 한 살, 둘째 만수(萬遂)는 스물 다섯. 선의 집은 평온해 보인다. 아내가 수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94세의 어머니(밀양박씨)가 얼마 전부터 몸져누웠기 때문이리라.
선은 소년 시절 외롭고 힘겨웠다. 그가 태어났을 무렵엔 가산이 넉넉했던 큰집에서 도와준 덕에 비교적 걱정없이 살았으나, 겸재가 6살 때 백부 정시설이 돌아간 뒤 지원이 끊기면서 갑자기 집안이 쪼들리게 된다. 14세 때는 부친 정시익마저 세상을 뜬다. 이후 선은 46세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몰락한 사대부 가문이었다고 하나, 그게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 박자진이 그의 재능을 보고는 그림을 권했다.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 일한 건 아니었고,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려 몇 푼 그림값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는 잔반(殘班)의 화인(畵人)이었다. 그러나 차츰 화명(畵名)이 높아지면서 그 값도 올라갔다. 마침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 신흥 안동김씨인 장김(壯金·장동김씨)들과 이웃하고 있었기에 그림을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학연(學緣)이 맺어졌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대신, 스스로의 특기(特技)를 발판으로 조선 지도층의 이너서클에 진입한 셈이다. 선은 그들과 격(格)을 맞추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시간 이외에는 늘 책을 끼고 다녔다. 그는 김창흡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승, 또 이병연이라는 걸출한 시인 지음(知音)을 둠으로써 쟁쟁한 네트워크를 갖췄다.
이렇게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기까지 결혼할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연안송씨와 혼인을 치른다. 그러나 아내를 맞은 뒤에도 바깥으로 돌 수밖에 없었다. 스케치 여행을 다니는 경우도 잦았고, 청하현감처럼 외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30대 시절에 금강산을 내집 드나들 듯 다닌 것은,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보고 또 보고 싫증이 날 만큼 돌아다니라’는 마음 속 스승 곽희의 말을 새겼기 때문이었다. 지방 관리로 내려가는 일 또한 그에게는 더없이 긴요한 화업(畵業) 수련과정이었다. 그림은 선에게 모든 것이었기에, 아내는 이런 남편을 말없이 이해해주었다. 마침 청하엔 정월대보름 무렵의 달이 환하다. 아내도 천리 먼 곳에서 달을 보고 있을까. 그는 송씨에게 그림편지를 쓴다. 출렁이는 바다에 뜬 달을 그렸다. 그리고 당나라 양사악의 시를 부제한다. ‘가고싶지만 언제가 될지/쓸쓸히 수레 돌려 다리를 내려가네(心期欲去知何日 回車下野橋)’
호미곶 비유어회(肥儒魚會)에는 지난번 해월루에 있었던 신유한, 최천익, 그리고 세오가 왔고, 스무 살 경주기생 하나가 함께 했다. 경기(慶妓)의 이름은 월섬(月蟾)이라고 했다. 월섬은 초충(草蟲) 그림을 잘 치는 아이로, 산수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자 왔다고 했다. 눈썹이 달처럼 곱고 살결이 환하여 시골에선 보기 어려운 미색이었다. 선비를 살찌울 청어가 나오기 전에, 얼린 조홍시(早紅枾)가 나왔다.
신유한이 입을 열었다.
“사또. 가객 박인로의 시조 ‘조홍시가’를 아시는지요.”
“알다마다. 백성들에게 효(孝)를 권면(勸勉)할 때 자주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예. 마침 조홍시가 나왔으니 그 노래를 한 번 부르도록 함이 어떨지요? 월섬이는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니 들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선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월섬은 거문고 앞에 앉아 줄을 매만진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유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난/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그를 설워하노라”
“내 먼 객지에서 들어서인지 참으로 마음을 붙잡는 노래로다.”
선은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최천익이 문득 끼어들었다.
“여기에 나오는 조홍감은 그냥 일찍 익은 감이 아니라, 청하의 느티나무 마을인 유천(柳川)에서 나는 쫑감을 말합니다. 쫑감은 조홍감이 변해서 된 말이고요. 영남 가인(歌人) 박인로가 청하의 쫑감을 보고 시조를 읊은 것이지요. 쫑감은 한 달쯤 빨리 익어 9월에 홍시가 되는데, 오직 유천마을에서만 나무가 자란다고 합니다. 딴 곳으로 옮겨 심으면 열매가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지요.”
“아, 그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얘기요.”
이때 겉말린 청어가 접시에 담겨 올라왔다. 쫄깃한 고기맛에 술잔이 자주 돈다.
“이것 참, 바닷 맛이 절로 나는 음식이로고.”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세오는 자신이 그린 청어도(靑魚圖)를 펼쳐보인다.
“비천한 솜씨지만, 한 번 보아주십시오.”
선은 말없이 오랫동안 화폭을 들여다보고는 나직이 묻는다.
“비웃은 비웃인데, 비웃의 무엇을 그렸는가. 왜 비웃을 그렸는가. 비웃을 본 사람은 비웃의 무엇을 보겠는가.”
세오는 조금 얼굴을 붉히더니 말을 꺼낸다.
“소녀, 비웃을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애썼습니다. 생각이 앞서서 실상을 바꾸지 않도록 비웃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그렸습니다.”
“실상을 그대로 베낄 셈이면, 실상을 보면 되는 것이지 굳이 베낄 이유가 있겠는가. 실상과 똑같도록 베끼려는 그 욕심이, 그림 그리는 일을 화공(畵工)의 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던가?”
“실상을 그리지 않는다면 무엇을 그려야 하옵니까?”
“그림은 실상의 재현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가상(假相)을 그려 그것을 나누며 즐기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이것을 우린 관념화라고 하지. 옛 중국인은 산수를 그릴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풍경을 그리려고 했다. 산수를 그릴 때 산수의 형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가 지닌 뜻을 관찰하라고 곽희는 말했지. 가보고 싶은 곳, 구경하고 싶은 곳, 노닐고 싶은 곳, 그리고 살고 싶은 곳. 그것을 그리면 묘품에 든다고 일러주었다. 이것이 관념산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기생 월섬이 목청을 가다듬으며 나섰다.
“모든 그림이 다 똑같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도 아니고 그저 생각 속에 존재하는 그런 풍경일 뿐인데, 그림을 바라보며 그것을 꿈꾸는 것은 허황함을 키우는 일이 아닐지요?”
“그래서 조선에서 실경(實景)산수를 주창하는 이들이 생겨났지. 하지만 이들이 부딪친 것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범상한 실경을 왜 굳이 그려놓고 들여다보느냐 하는 반론이었지. 그림의 효용이 대체 뭐냐는 것이었지.”
“하오면, 범상하지 않은 실경을 찾아 그리면 되지 않을까요? 산수를 그려놓고 보는 것은 굳이 발품을 팔고 시간을 내서 그 험준한 산으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방안에 앉아 생각의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여행을 대신해주는 것을 맡으면 되지 않을지요?”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금강산 그림 바람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금강산 그림 또한 실경으로 그려보면, 우리가 걸어다니면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각과 기운, 그리고 움직임이 표현되기 어렵더군. 즉 그리는 순간, 산 속을 걷는 느낌이 죽어버리고 그냥 평범한 산, 굳은 사물같은 산만 남게 되기 쉽다는 것이지.”
“사또께서는 조선에 진경이라는 큰 화풍을 불러일으켰는데, 진경은 대체 실경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요?”
“그게 말이다. 시간을 두고 파고들수록 더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되더구나. 대체 진경이 무엇인지 점점 더 모르겠어. 단지 중국의 산과 강이 아닌 조선의 산과 강을 그리면 그게 진경인지…. 아니면 중국 관념산수의 관념을 팽개치고 오직 외면에 나타나는 경치를 그리면 그게 진경인지…. 아니면 유학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적 사유를 화면 구성이나 표현기법에 도입하면 진경이 되는 것인지…. 실경을 그리면서 관념을 담는 것이 진경인지…. 젊을 때는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뚜렷한 진경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정체가 오히려 모호하게 되었어.”
“그렇다면 진경에 관한 생각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인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시대적인 흐름이라면 분명히 어떤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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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작품 ‘내연삼용추’에 나오는 연산폭포. |
“음…, 그래. 그거 일리있는 생각이다. 조선산수화가 중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까닭은 중화가 오랑캐에게 자리를 내준 이후 조선이 그 중화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소중화(小中華)사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지. 즉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중국 방식의 모든 관행을 재고하도록 각성시키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 현실, 현상, 실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시 철학을 입론(立論)해야 한다는 주체적인 생각이, 시문을 비롯해 사회제도와 음악, 예술 등의 문화 흐름까지도 지배하기 시작한 거야. 금강산은 바로 조선산수의 큰 상징이었고, 그것으로부터 진경산수의 기운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내가 영남을 비롯해 조선 각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조선 진경문화를 전국으로 확대하여 하나의 중심문화로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아닐지?”
그때 세오가 문득 소리쳤다.
“옳사옵니다. 그러니까, 진경은 바로 우리 자연을 우리식대로 즐기는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조선의 청어를 그리는 것을 넘어 그 청어 그림이 조선사람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군요.”
“그래. 금강산 그림들이 큰 호평을 받으면서 우리 산수를 표현하는데 적절한 그림기법(겸재준법)을 도입하면서도, 중국의 관념산수가 지니고 있던 철학적인 깊이와 음미하는 즐거움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를 고민해 왔어. 방향은 잡혔는데,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명쾌하지 않아. 이게 왜 진경(眞景)인지 설명하기 어려워.”
이때 신유한이 말했다.
“청하엔 내연산이라고 깎아지른 바위에 폭포가 장관인 곳이 있소이다. 이곳을 소재로 삼아 진경의 화두를 좀더 면밀히 가다듬는 것은 어떠할지요?”
최천익도 한 마디 거들었다.
“산수화에 있어서 성리학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아리송합니다. 이 문제는 그림을 낮춰보는 풍토 때문에 정작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소홀히 다뤄온 느낌이 있습니다. 음양이나 풍수로 유학이 들러리서는 일이라면 차라리 갖다붙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산수와 성리가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논변이 필요하겠군요.”
선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일리있는 생각이오.”<계속>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작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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