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겸진경(淸謙眞景)= ‘청하’와 ‘겸재’의 줄임말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뜻한다
“선대 왕께서 열두 폭포를 유람하시고 詩를 지어 각판을 남기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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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의 가을 풍경. ‘청겸진경의 비밀’에서 선(敾)은 내연산을 오르던 중 보경사에서 멈춰선다. 이곳에서 동종(銅鐘)을 하사했던 숙종 임금을 추억하면서 보경사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다. 연기설화에 의하면 보경사는 신라 26대 진평왕 때 세워진 절로 알려져 있다. 동해안 명산에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를 막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지명법사의 말을 들은 진평왕이 내연산을 발견해 현재 보경사 자리에 사찰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진=포항시청 제공> |
선(敾)은 월섬(月蟾)을 생각하고 있었다. 얼굴이 달처럼 보얗고 허리가 버들같던 그녀는 여윈 손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잠깐 눈물을 보이는 듯했다. 몇년 전 돌아가셨다는 어미를 생각한 것일까. ‘조홍시가’를 들으며 선도 병든 노모를 떠올렸기에 애틋한 기분이 전해졌다. 월섬은 기생인 어미를 따라 기적(妓籍)에 올려졌지만, 어미를 여읜 이후 방면(放免)되어 자유로워졌다. 그녀는 언젠가 경상관찰사를 따라와 구경했던 내연산에 반해 이곳 청하로 들어왔고, 보경사 절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직도 기생을 자처하느냐?”
“스님과 보살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화기(畵妓)라고 하였는지라, 그것이 별호(別號)처럼 되었습니다.”
“월섬이란 기명은 누가 지었는가?”
“저의 어미가 지었습니다. 월(月)은 초승달처럼 허리가 가는 여인이요, 섬(蟾)은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난 항아(姮娥)가 서왕모(西王母)의 노여움을 사서 두꺼비가 되었으니, 역시 달처럼 환한 선녀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너 또한 세오(細烏)와 같은 달이로구나. 양편에 달이 둘이나 떴으니 밤이 어둡지 않도다.”
좌중은 웃었다. 흰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리는 월섬은 더욱 아름다웠다. 선의 곁에 와 앉았을 때 그녀는 입가에 손나팔을 하더니 가만히 말했다.
“사실 어미가 저를 부를 때는 달섬이라 하였습니다. 기적에 올리면서 월섬이 되었지요. 하여 월섬이라 부르는 이는 한 번 그냥 안 것이요, 달섬이라고 부르는 이는 제 속을 안 것입니다.”
선이 그녀에게 ‘영남첩’ 사생(寫生)을 위해 해인사 여행을 함께 하자고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신라 때 지은 대찰로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비정(秕政)에 낙심하여 일가를 이끌고 들어가 숨은 곳이다. 조선 세조 때 중창한 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병화(兵火)를 면했는데, 겸재의 시대인 숙종대에 여러 차례 화재를 만났다. 만월당, 원음루, 무설전이 모두 불에 타 중건을 거듭한다. 선이 이 절을 영남첩에다 포함시킨 것은, 명승대찰이 더 이상 소실되기 전에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월섬은 안 그래도 꼭 한 번 해인사에 가보고 싶었다면서 기뻐한다. 최천익과 세오도 따라왔다. 선은 150칸 2층짜리 대적광전과 유명한 대장경각을 꼼꼼히 그려넣는다. 최치원의 추억이 숨은 학사대와 사명대사가 기거하던 홍제암도 빼놓지 않았다. 건물을 배치한 뒤 미점(米點)을 힘있게 두드려 가야산의 부드러움과 가운데 암봉(岩峰)을 조화시키고 있을 때 월섬은 최치원의 시 한 수를 거문고에 실어 읊는다.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어올까 늘 두려워, 물소리 흐르게 하여 꼭꼭 감싸는구나(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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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산 12폭포 중 여덟번째 폭포인 은폭(隱瀑). 원래는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았다고 해서 음폭(陰瀑)이라고 불리다가 상스럽다고 해서 은폭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
“가마를 여기 세워라.”
선은 내연산 중턱의 보경사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사또가 지팡이를 짚은 채 성큼성큼 올라간다. 늙은 승려 도암(道巖)과 젊은 오암은 그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일행은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여기 보경사엔 선대 왕(숙종)께서 들르지 않으셨던가요?”
선이 묻자 도암이 대답한다.
“예. 이곳 사찰에 오셔서 동종(銅鐘)을 하사하셨습니다. 비길 데 없는 광영이었습죠. 또 선대 왕께서는 내연산 열두 폭포를 유람하시고, 시를 지어 그 각판(刻板)을 남기셨지요.”
“그 얘길 들었소이다. 왜구를 물리치는 영험을 가졌다는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절터 아래 묻었다지요? 그런 호국(護國)사찰인지라 각별한 관심을 두신 듯하오만.”
“예. 원래 절이 서 있는 일대가 큰 연못이었다고 합니다. 신라 때 지명(智明)이 진나라에서 큰 스승을 만나 그 거울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스승은 오색구름이 이는 곳에 거울을 묻고 절을 지으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돌아와 전국을 살피다가 내연산에서 오채운(五彩雲)을 발견하여 보경을 묻었지요. 그 뒤 연못을 메워 금당을 지었습니다.”
“왕이 행차하실 때 수종(隨從)하는 많은 이가 왔을 텐데 산골에서 어떻게 귀한 손을 대접하였는가?”
“보경사에는 지금도 비사리구시라고 하는 큰 나무밥통이 있습니다. 쌀 일곱가마 분량의 밥을 거기 담았지요. 4천명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허허, 대단했겠구려.”
“왕이 친히 명산을 유람한 예는 워낙 보기 드문 일인지라…. 지금 걷고 계신 이 길은 어로(御路)라고 할 만합니다.”
“그렇군요. 걸음마다 옷깃을 여밀 일입니다.”
조금 더 걷다가 다시 승려가 말을 건넨다.
“우담(愚潭·정시한·1625∼1707) 선생이 전국 산천을 유람한 뒤에 그 중에서 내연산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허허, 그건 나도 알고 있소이다만.”
선은 반가운 듯 말을 받았다. 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선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담의 산중일기(山中日記)를 읽었습니다. 내연산 용추(龍湫)는 금강산에도 없는 절경이라고 말했더군요. 놀라운 평가였습니다. 그래서, 나 또한 이 곳을 꼭 탐승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금강산 그림으로 화명을 얻었으니,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내연산을 꼭 보러 와야겠다 싶더이다.”
중허대(비하대의 옛 명칭)를 넘어 시명리를 향해 오르다가 선은 월섬에게 물었다.
“이곳은 이름이 무엇이냐?”
그녀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은 뒤 대답했다.
“제8폭포인 은폭(隱瀑)이라고 하옵니다.”
“은폭이라? 가려진 폭포는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름이 그렇단 말이냐?”
그러자 갑자기 월섬이 얼굴을 붉힌다. 곁에 있던 최천익이 웃으며 말을 거든다.
“사또. 여인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여 대신 대답하여도 될지요?”
“허허. 그러게나.”
“실은 이 폭포 이름이 음폭(陰瀑)입니다. 형상이 여성의 거기를 닮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인조반정 이후에 취흘(醉吃) 선생(유숙·1564∼1636)이 청하로 귀양을 왔지요. 자주 여기에 올라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취흘은 은폭의 양쪽 바위 형상을 보고는 한산대(寒山臺)와 습득대(拾得臺)로 이름을 붙였지요.”
“당나라의 기인 승려였던 한산과 습득에서 이름을 빌렸구먼? 그 두 은(隱)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은폭이기도 하다?”
“예. 그렇습니다. 취흘 선생이 보경사를 오가면서 불교에 심취해 있던 때였습니다.”
“그랬구먼. 월섬은 한산과 습득을 아느냐?”
“이름은 들었지만, 자세히는 모릅니다. 사또께서 무지한 소녀의 눈이 밝아지도록 설명을 조금 해주시면….”
“허허. 한산과 습득, 이 사람들은 괴짜 시인이자 승려였지. 중국 천태산의 국청사(國淸寺)에 있던 풍간이라는 승려의 제자들이었어. 한산은 농민이었는데, 워낙 책만 읽어서 아내와 가족에게 버림받아 국청사 근처의 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지. 습득은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이였는데, 풍간이 절로 데려와 심부름하는 아이로 키웠다네. 습득은 대중이 먹다남은 음식 찌꺼기를 모아서 한산에게 가져다 주었지. 습득이 마당을 쓸고 있을 때 한 스님이 이렇게 물었네. ‘너를 습득이라 부른 건 풍간이 너를 주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그때 습득이 빗자루를 놓고는 양손을 마주잡고 우뚝 서 있었다고 하네. 이 대목이 선문(禪門)에선 큰 화두가 되었지. ‘차수이립(叉手而立·양손을 잡고 서있다)’이 그것이라네. 또 한산은 해어진 옷에 뾰족한 모자를 쓰고 커다란 나막신을 끌고 다니면서 가끔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지르다가 나뭇잎이나 절의 담벼락에다 시를 썼지. 여구륜(呂丘侖)이란 사람이 병을 앓았는데, 풍간에게 찾아가니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주문을 외워 싹 낫게 해주었어. 그래서 어떻게 고쳤느냐고 물었더니, 한산과 습득을 가리키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에게 물어보라’고 대답했다고 하네. 그래서 여구륜이 두 사람에게 찾아가 다시 물었더니 ‘아니 아미타불도 몰라보고, 우리한테 와서 뭘 알겠다는 건가’하고 대꾸했다지. 그러니까 세 사람은 바로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화신이었다는 거지.”
말이 끝났을 때 거문고를 잡으며 월섬이 말했다.
“청나라의 화가들이 화제(畵題)로 곧잘 삼는다는 한산과 습득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 불러봐도 될는지요.”
“허허. 좋고말고.”
“하하하 걱정 않고 웃는 얼굴 번뇌도 적다
이 세상 근심일랑 내 얼굴처럼 바꾸어라
사람들 근심 걱정 밑도 끝도 없더라
큰 진리는 오히려 기쁨 속에서 피는 것
나라가 잘 되려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
야 하고
집안이 즐거우려면 가족이 서로 뜻이 맞아야
하지
손발이 맞는 곳에 안 되는 일 하나 없네
부부간에 즐거우면 금실이 좋아지고
손님과 주인도 즐거워야 하는 법
아래 위가 다 즐거우니 기쁨 속에 법이 있네
하하하”
최천익이 나섰다.
“저도 한산의 시를 한 수 읊어보겠습니다.”
“二儀旣開闢(이의기개벽) 하늘과 땅이 이미 열려,
人乃居其中(인내거기중) 이에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사네,
迷汝卽吐霧(미여즉토무) 안개를 토해서 너를 헤매게 하고,
醒汝卽吹風(성여즉취풍) 바람을 불어서 너를 깨어나게 하며,
惜汝卽富貴(석여즉부귀) 부귀를 주어서 네게 아까움을 알게 하고,
奪汝卽貧窮(탈여즉빈궁) 빈천을 주어서 네게 없음을 알게 하나니,
碌碌群漢子(녹록군한자) 허덕이는 무리들아,
萬事由天公(만사유천공) 만사는 하늘에 있느니라.”
이때 세오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습득의 시를 하나 읊었다.
“從來是拾得(종래시습득) 원래 습득이란 이 이름이
不是偶然稱(불시우연칭) 우연히 붙여진 게 아니라네.
別無親眷屬(별무친권속) 별다른 부모나 가족 없으니,
寒山是我兄(한산시아형) 한산 그 사람이 내 형이라네.
兩人心相似(양인심상사) 두 사람 마음이 서로 같으니
誰能徇俗情(수능순속정) 누가 사람끼리의 사랑을 말하는가.”
세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선은 다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삼척부사로 가 있는 벗인 사천(이병연·1671∼1751)이 보고싶었다. 兩人心相似!(양인심상사), 그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선은 가만히 거문고를 만지고 있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월섬아. 너는 성류굴이 보고싶지 않느냐?”
<계속>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작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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