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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2011-12-27

청겸진경(淸謙眞景)= ‘청하’와 ‘겸재’의 줄임말에 ‘진경(진경산수)’을 연결시킨 합성어로 진경산수의 발현지가 포항임을 뜻한다

겸(謙)의 의미를 가르쳐준 나무 오늘은 내가 진짜 겸재로 거듭나게 된 날이다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겸재 정선이 청하현감 시절 완성한 ‘내연삼용추’. 겸재는 내연산의 폭포와 풍경을 주제로 청하시절 최고의 걸작 ‘내연삼용추’ 2점을 남겼다.

선은 세오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청이 있다더니…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너무 행복해서 그렇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사또와 둘이서 중허대에 한 번 오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관음폭에 사또의 이름을 각자(刻字)하고 싶습니다.”

“허허. 왜 그러느냐? 유산(遊山)하는 것은 당연히 반길 일이지만, 굳이 내 이름을 새기고 싶지는 않구나.”

“아닙니다, 사또. 어제 꿈을 꾸었사온데, 사또와 이별하는 꿈이었지요. 지금껏 그런 생각은 없이 그저 사또와 오래 같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곧 한성으로 떠나실 분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고 눈 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래서 사또께서 떠나시면 각자라도 들여다보며 견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또, 이런 제 마음을 물리치지 마시기를….”

“그것이 네게 위안이 된다면야 내 헛된 이름이 귀한 바위를 조금 깎은들 내연산 할무당이 노하진 않으리라. 허허.”

“은혜가 망극합니다. 사또.”



세오는 교리(校理)를 지낸 명필인 이현망(1688∼?)에게 글자를 부탁했다. 그는 반가워하며 명인(名人) 사또 곁에 자신의 이름을 함께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선은 그 얘길 듣고는 “훌륭한 이 곁에 숨어서 다행이다”며 껄껄 웃었다. 이현망은 ‘갑인추정선(甲寅秋鄭敾)’과 자명(自名)을 나란히 써주었다. 선과 세오는 연산폭에 들러 각자했다.

“너무 깊이 새기지 말거라. 부질없다.”

글을 새기는 이에게 선은 주문했다. 세오는 옆에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몇 번 정선(鄭敾) 두 글자를 어루만진 뒤, 그녀는 선의 뒤를 따라 중허대로 올랐다. 험준한 길이다. 문득 세오가 물었다.

“사또는 이곳에 오셔서 보람있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음. 글쎄. 내연산을 발견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연산도 이 땅의 산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굳이 ‘발견’이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이옵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서른 살에 이곳에 들렀다면 아마도 다른 내연산을 보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삼십년의 세월을 겪고 난 다음에 이곳에 왔으니 산이 달리 보이는 것이리라. 결국 경물(景物)의 산을 본 것이라기보다는 마음 속에 있는 산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싶구나.”

“마음 속의 산은 어떠하옵니까?”

“아름답다. 장엄하고 처연하다. 계절이 나뭇잎들이 추락하는 가을인지라 그런 기운이 더욱 뚜렷하질 않느냐.”

“그것은 슬픈 산이 아니옵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인생도 올라가는 시절이 있고 내려가는 시절이 있다. 굳이 따진다면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같은 길이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올라가는 산길에선 산꼭대기와 하늘만 보인다. 하지만 내려가는 산길에선 길가에 핀 꽃도 보이고, 비로소 저 먼 땅바닥도 보이며, 졸졸 흐르는 샘물도 마시며 머문다. 길을 음미하며 걸어온 날들을 추억하며 가는 것이다. 이것 또한 산수의 일부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다른 산에도 내려가는 길은 있을 것이고 계곡 또한 있을 것이니, 굳이 내연산의 진경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않을지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무려 열 두 개의 폭포가 있어 하강하는 물이 향연을 펼치는 산이다. 금강산이 상승산수라면 이곳은 하강산수다. 물의 장엄한 추락은 낮은 곳에 처하는 삼엄한 심법(心法)을 일깨우는 게 아니냐? 처연한 물의 낙법. 이것이 인생의 백미이며 산수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이라는 생각을 이 내연산에서 얻었노라. 사방을 돌아보건대 폭포수도 떨어지고 잎사귀도 떨어지며 월섬이도 떨어지고 겸재 인생도 여기 흘러내리고 있도다. 하지만 진실로 이것이 없다면 상승 또한 의미없는 것이지 않겠느냐.”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내연산폭포도에 등장하는 낙락장송으로 추정되는 노송.

그들은 숨을 몰아쉬며 중허대로 올랐다. 그 앞에 너른 바위 앞에 서 있는 낙락장송을 보았다.

“세오야. 너 저 나무를 짚고 서있어 보아라.”

선의 주문에 그녀는 소나무에 기대어 서서 발 아래 폭포를 바라본다. 한 줄기 바람이 땀 흐른 귓가를 스치며 생각이 티끌없이 맑아진다.

“아래를 바라보니, 인간이 사는 일이 작고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 네 말이 신선의 기상을 닮았구나. 여기가 초월한 이들의 세상관람처가 아니겠는가.”

선은 대답하며 세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세오야, 이 그림을 부채에 그려 너에게 주겠노라. ‘의송여인관란도(倚松女人觀瀾圖)’라고 이름하면 좋겠구나. 나 또한 저 나무에 설 테니 내 모습을 한 번 그려보려무나.”

“제가 감히 어찌….”

“허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 또한 영남의 자부심 강한 화인일진대….”

선이 고송에 기대자, 세오는 빠르게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 단풍 몇 잎이 계곡 아래로 팔랑팔랑 날아간다. 선은 세오의 그림을 바탕으로, 얼마전 화의(畵意)가 솟았던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를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사생(寫生)을 끝낸 세오가 지필묵을 챙겨넣으면서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사또. 사또의 총애가 워낙 월섬에게로만 향하는지라 감히 말씀 못드렸사옵니다만….”

늙은 나무에 의지해 서 있던 선은 세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소녀는 사또를 처음부터 깊이 사모하여 왔습니다. 화업은 물론이고 인품과 학식, 그리고 예술을 탐구하는 뜨거움까지, 날마다 밤마다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사또께서 벽촌의 어리석은 화생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에, 그것만으로도 은혜는 넘치지만….”

“세오야.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사또께서 임기가 끝나 한성으로 올라가시면, 이곳 청하는 제게 캄캄해질 것입니다. 하여 저를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계시다면, 한 번만이라도…깊은 총애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

“한 번만이라도, 제게 터럭같은 연민이라도 가지고 계시다면….”

“세오야. 이미 월섬의 일만으로도 내가 어지럽고 괴롭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 어찌 이러느냐?”

“사또. 미련한 소녀, 깊고 아름다운 화인의 길을 이어줄 자식 하나를 갖는 게 소원입니다. 사또가 가신 뒤에 아이를 의젓하고 분명하게 키워 이 땅의 진경산수의 도를 잇도록 하고 싶습니다. 부디 꺾지 말아주십시오.”

“세오야, 그건 아니될 일이다.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느냐?”

“사또. 며칠 전 제가 꿈 얘기를 드렸었지요? 사또를 보내던 그 꿈에 영조대왕이 나타나셔서 크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떠난다고 너무 울지 말아라. 그는 너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갈 것이다. 그의 호가 겸재가 아니더냐? 겸재의 겸(謙)은 주역으로 풀면 곤(坤)과 간(艮)으로 이뤄져 있느니라. 곤은 어머니에 해당하는 것이고, 간은 세 번째 아들인 막내자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겸재에겐 이미 장성한 두 아들이 있다. 그러니 세 번째 아들은 네게서 날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시면서 겸재에게 이 말씀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은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임금이 꿈에 나타나 그런 말씀을 하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문득 영조가 선을 청하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던 일이 기억났다.

“겸재는 현감으로 가 계신 동안 영남과 동해안의 승경을 섭렵하여, 조선 산수의 진경을 제대로 갖추도록 하시오. 아마도 진경의 요체는 겸산겸수(謙山謙水)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임금은 겸재 속에 들어있는 겸(謙)을 다시 떠올리게 하셨을까. 눈물이 얼룩진 세오의 뺨을 어루만지며 선은 생각에 잠겼다. 겸(謙)이라…. 갑자기 영감이 번득이며 스쳐갔다.

‘아하! 지산겸(地山謙).’

주역의 지산겸은 아래 맨 위 막대는 온전하고 아래 막대 두 개가 터진 간(艮)이 밑에 있고, 세 막대가 모두 터진 곤(坤)이 위에 있다. 이 형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폭포 두 개가 잇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주역은 겸(謙)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산겸은 하는 일을 완성하는 끝맺음의 궤이다. 하늘의 도는 가득찬 것에서 덜어 겸손한 것에 보태주고, 땅의 도는 가득찬 것을 비우고 겸손한 것에 흘러든다. 겸손한 자는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 빛나고 비천한 자리에 있어도 남이 얕보지 못하니, 군자가 지녀야 할 마지막이다.’ 아, 그러니까 내연산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는 인격도야의 겸산겸수를 천하에 알리는 묘처가 아니던가. 낮은 산 낮은 물. 이제야 알겠구나. 진경(眞景)은, 산수가 지닌 덕을 인간의 도(道)로 삼아 입문하는 빛나는 수행처임을.

“세오야. 네가 깊은 깨달음을 주었구나. 이제 내가 그려야 할 진경은 바로 겸산겸수로다. 우리를 깨우쳤던 저 소나무를 겸송(謙松)이라 이름짓고 싶구나. 겸(謙)을 가르쳐준 나무. 오늘은 내가 진짜 겸재로 거듭나게 된 날이다. 이제 상승처의 진경과 하강처의 진경을 섭렵하여, 도처 강산에 내재해 있는 큰 정신을 삼엄하게 대면하리라. 다시 그려야겠다. 세오야, 어서 내려가자.”

선은 또 하나의 ‘내연삼용추’를 그린다. 복잡하던 산경의 오른쪽 부분을 과감히 없앴다. 벼랑 갓길도 치워버렸다. 대신 폭포가 세 번 방향을 트는 그 움직임을 힘있게 표현했다. 그리고 산과 바위 또한 물의 기운에 조응하여 함께 움직이는 듯한 동세를 살려냈다. 관음폭 아래에는 유산(遊山) 나온 선비들이 앉거나 서서, 겸(謙) 한 글자로 내려앉는 산의 깊은 뜻을 음미하고 있다. 그 선비들의 귀로 들려오는 폭포성이 생생하다. 낮아져라! 일대 화두(話頭)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이 소리. 귀가 환하다. 추락의 소리가 상승의 혼을 돋우는 겸(謙)의 노래. 청겸(청하겸재)이 뽑아낸 조선 최고 진경의 비밀이 아니던가. <끝>

글=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 포항시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겸재가 청하 현감시절 남긴 또다른 내연삼용추.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내연산 의 절경을 담은 내연산폭포도.


[2011 스토리텔링 淸謙眞景의 비밀 .8] 깨달음의 저 나무를 겸송이라 부르리라
청하성읍도. 겸재가 청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청하읍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역사적 자료로 남기려는 의도가 담긴 듯 성안의 건축물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지금도 그림에 나오는 회화나무가 청하읍성 자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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