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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포항 '죽장 선바위 旅風시대' .3] 홍시 하나의 사연

2012-08-30

Story

“무하옹의 한글 노래로 입암이 조선 명승으로 이름나게 됐지

내가 지은 이름들을 전파해 준 것은 바로 이 사람이네”

▶여풍(旅風)은 17세기에 불던 ‘여헌(旅軒) 장현광 바람’을 의미한다. 여헌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아우르는 당대 유학의 거장으로, ‘여풍’은 그가 포항 죽장의 선바위(立巖)마을에 은거하며 남긴 위대한 가르침과 입암28경을 따라 떠나는 ‘스토리여행(旅)의 신바람(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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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세는 연못이라 하여 이름 붙인 ‘수어연’. 이름처럼 물고기를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깊고 선명하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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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주위의 바닥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깔려 있다. 북두칠성을 닮았다 하여 ‘상두석’이라 부른다. 여헌이 머물 때는 7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개수가 줄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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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세 바위 가운데 가장 뒷 부분에 위치한 ‘기여암’. 나를 일으키는 바위라는 뜻에서 이름을 기여암이라 지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죽장 선바위는 여헌 장현광 이전에도 서있었고 여헌 이후에도 여전히 서있지만 그 전후(前後)는 아주 다르다. 여헌이 입암28경을 이름 지은 뒤로 이 일대는 시인 묵객의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지은 이름은 400년간 이곳의 명성을 키우며 화제를 불러 일으켜 왔다. 한 사람이 한 지역의 산과 바위와 개울에 대해 한꺼번에 이름을 짓고 그것이 이토록 세간에 힘있게 유통되고 있는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여헌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솔안마을(松內) 주민에게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와 개천의 이름을 물었더니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앞산 뒷산이며 옆개울이며 너른 들판이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풍경인데 그것을 부를 이름이 없다는 점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그 가치를 돋우고 기억하게 하며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불려지면서 신뢰감있는 브랜드가 된다는 것을 여헌은 파악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시작이 네이밍임을 간파한, 선구자적인 스토리텔러였다.

여헌은 단순히 이름을 짓고 그친 게 아니라, 그 이름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유학적 세계관과 전통적 미감을 일깨우는 명칭을 강의에 활용함으로써 그 이름이 의미심장해지도록 했다. 여기에 시인들이 저마다 시제(詩題)로 사용함으로써 콘텐츠와 감성의 폭을 넓혀 놓는다.

여헌은 스스로 ‘입암13영(立巖十三詠)’을 남겨 스토리텔링의 시범을 보였다. 그에게 솔안마을 일대를 천천히 거닐면서 그가 붙인 이름들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 ‘입암사우(四友)’와 몇 명의 제자들이 동행했다. 도화도 함께 따랐다. 빈섬이 우스개 삼아, 네이밍의 달인께서 이 나들이 프로그램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여헌은 이렇게 말한다. “선바위 여풍(旅風) 둘레길이라 하면 어떨까?” 오. 과연 간략하면서 핵심을 찌르고 있다. 17세기 여헌(旅軒)바람을 맛보는 길이며 ‘나들이의 신바람’이기도 한 여풍(旅風)이란 말.

“그런데, 길을 나서기 전에 잠깐 소개할 분이 있소이다. 사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이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빈섬은 일행을 돌아본다. 낯선 얼굴이 하나 보인다. 여헌보다는 연하로 보이는 깡마른 체구의 남자. 과묵한 인상이지만 눈빛이 형형하다.

“이 분은 무하옹(無何翁)이라고 하네.”

“아, 무하옹이라면 노계(蘆溪) 박인로 선생님(1561~1637) 아니십니까?”

그의 손을 덥썩 잡자, 무하옹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빈섬의 손을 잡아준다.

“2012년 세상에서는 내가 유명하다더니 과연 그런가 보오.”

“예. 그렇고 말고요.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손꼽히고 있지요. 선생님의 시는 교과서에도 많이 나옵니다. 누항사(陋巷詞), 선상탄(船上嘆)도 유명하지만,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는 저도 암송하고 있습니다.”

여헌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조홍시가라면 나와 인연이 깊지.“

“아, 그렇습니까?”

“나는 평생 동안 이곳 선바위 마을을 네 차례 찾아왔네. 43세(1596년) 때 이곳에 왔다가 찬탄하고 돌아간 후 4년 뒤(1600년)에 다시 와서 산수의 이름을 지었다네. 그리고 76세(1629년)때에 와서 머무르다가, 이후 지금(1637년, 84세) 마지막으로 사랑스러운 이곳에서 눈감으려고 온 것이라네. 군인이며 시인이었던 무하옹에 대해선 영천 일대의 문인들로부터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지. 내가 두 번째 입암에 올 때 저이가 찾아왔네. 그는 마흔살이었고 나는 마흔일곱이었어. 무하옹은 전 해(1599년)에 무과에 급제해서 거제도의 한 포구인 조라포라는 곳에서 만호(萬戶)를 지냈지. 월급도 토지도 주어지지 않는 무급 관직이었지만 저이는 청렴하면서도 의욕적으로 일을 해 퇴임 때 백성들이 송덕비까지 세워줬다고 하네. 저이는 그때 내게 가르침을 얻으러 왔었지. 그 무렵 꿈 속에서 주공(周公, 중국 주나라의 예악과 법도의 기틀을 잡은 정치가)을 만나, 성경충효(誠敬忠孝)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했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어. 강당에서 공부할 때 도화가 청하 유천(柳川)마을에서 나는 조홍감(쫑감)을 담아왔어. 그러자 저 사람은 즉석에서 시조를 읊었어.”



반중(盤中)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그를 설워하노라



빈섬이 자신도 모르게 시조를 읊조렸다. 그때 여헌의 눈빛이 살짝 젖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말했다. “원술이 건네준 귤(유자) 세 개를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가슴에 품은, 오나라 여섯 살 배기 육적의 이야기도 아름답지만, 무하옹의 저 시는 그 뜻을 뛰어넘음이 있었지. 시조를 들으며 나를 돌아보았네. 나는 38세때 홀어머니(성주 이씨)를 여의었지. 아홉 달 병마 끝에 끝내 잃고 말았어.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 복상(服喪)도 못한 채 상복 보자기만 들고 금오산에 피란갔네. 고향에 돌아오니 숨겼던 신주도 사라지고 묻었던 제기도 없어지고 말았지. 어머니를 다시 잃는 기분이었어. 묵방사 절에 들어가 한달 내내 미친 듯이 절을 했더니 무릎이 다 망가져 평생의 병이 되었네. 그랬던 나인지라, 조홍시의 노래가 어찌 가슴에 사무치지 않았겠는가.”

“저 또한 선생님의 눈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도학의 경지가 깊으신 분이 시가에 정회를 드러내시는 것을 보고, 오히려 제 마음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조홍시 하나씩을 들고 둘이서 잠깐 다른 벽을 바라보며 오열하던 정경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무하옹은 이 마을로서도 아주 특별한 가객이네. 그가 지은 입암별곡과 입암가 29수는 이곳을 조선의 명승으로 이름나게 하였지. 그리고 내가 지은 이름을 힘있게 전파해준 것은 바로 이 사람이라네. 쉽고도 친근한 한글 노래로 만든 일은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판단이었네. 백성과 후손들은 그의 노래를 통해 내가 지은 이름들을 기억하게 되었지. 참 고맙고 기특한 이가 아닐 수 없네.”

그윽하게 무하옹을 바라보던 여헌선생, 앉았던 너럭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여풍 둘레길을 떠나보세.”

“사실, 이번 스토리여행은 선생님이 더 전문가이신지라 제가 따로 설명을 할 것이 별로 없을 듯 합니다.”

빈섬이 이렇게 말하자, “허허. 그러면 월급을 누가 주겠나? 내가 하는 말들에다 열심히 해설을 달아야 밥값을 하는 것이지”라며 여헌선생은 껄껄 웃었다.

“우선 지역별로 묶어서 설명하는 게 좋겠군. 우선 선바위와 그 주변부터 한번 보자고. 선바위가 서있는 개울은 이름이 가사천(佳士川)이라 하네. 아름다운 선비같은 개천. 이것은 이미 지어져 있던 이름인데, 그대로 훌륭한 네이밍일세. ‘물을 보는 것도 노하우가 있다’(觀水有術)고 말한 것은 맹자였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결의 움직임을 살피라고 하였네. 세상의 일을 살펴 그 흐름을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지. 선바위(입암, 탁립암, 입탁암) 앞에는 경심대(鏡心臺)와 수어연(數魚淵)이 있고, 선바위 뒤에는 계구대(戒懼臺)와 기여암(起予巖)이 있네.”

선생은 기문(記文)에서 이렇게 써놓고 있다. ‘입암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에 돌이 깔려있는데 모가 나고 우뚝 솟은 것이 출몰하고 이리저리 종횡한다. 가운데는 틈이 있는데 가로세로 한 길쯤 된다. 흐르는 물이 이곳에 멈추어 깊이 파이고 매우 맑아 작은 못이 되었다. 이 돌을 이름하여 경심대(마음거울의 누대)라 하고 몸을 씻고 치아를 닦으며 물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이 못을 이름하여 수어연(고기를 세는 연못)이라 한다.’

한편 입암 바닥에 깔린 돌은 북두칠성과 닮았다 하여 상두석(象斗石)이라 부른다. 여헌은 물에 잠긴 작은 돌들까지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가사천의 흐름을 보면 태극처럼 에스(S)자로 급격히 휘돌며 흐르는데, 일재당에 앉아 그 물길을 구경하는 맛이 장쾌하다.

또 ‘대(臺) 위는 10여명이 앉을 만하니 차를 끓이고 술을 데우는데 적당한 장소이며 따라온 노비와 어린 아이들도 곁에 편안히 앉을 곳이 있다. 그 위에 앉으면 3면이 모두 절벽이어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계구대(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누대)라 부른다. 입암 뒤쪽에 한 바위가 산처럼 솟아 있으니 높이가 4~5길이 될 만하고 주위는 수십 척이다. 높이 솟고 우뚝하여 구름이 주둔해있는 곳이다. 소나무 수십 그루가 용 모양의 가지로 서로 얽혀 신선이 사는 곳의 풍취가 있어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자연히 흥기(興起)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칭하기를 기여암(나를 일으키는 바위)이라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 여헌선생 말씀대로 빈섬이 밥값을 해야할 찬스다. 경심(鏡心)과 수어(數魚)는 문학적인 명칭이지만, 계구(戒懼)와 기여(起予)는 옛 책에 나오는 말이다. 계구는 중용(中庸)의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조심하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하며 무서워한다’에서 따온 것이고, 기여는 논어의 공자말씀인 ‘나를 일으키는 자는 상(商)이다, 비로소 함께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구절에서 왔다.

상(商)은 공자의 제자 자하를 가리킨다. 자하가 시경의 한 구절인 ‘소박함이 현란함을 만들었구나’라는 대목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공자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여백이 있은 뒤에야 가능하다’(繪事後素)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하는 ‘예(禮)는 뒤에 생긴 것이군요’라고 다소 튀는 코멘트를 하는데, 이 말을 듣고 공자가 기뻐하며 저렇게 말한 것이다. ‘이제 너랑은 시를 논할 만큼, 말이 좀 통하는 것 같아.’ 대화가 조금 비약적으로 발전하는지라 행간을 곰곰이 읽어야 하지만, 수많은 옛선비들을 열광시킨 대목이므로 이 대화를 이해못하고 지나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에 가깝다.

여하튼 여헌은 기여암을 보며 공자의 멘트와는 조금 다른, ‘나를 일으키는’ 분발의 의미를 담고자 했다. 입암 뒤에 있는 바위의 두 곳을, 하나는 ‘두려움’(계구대)으로 삼고 하나는 ‘신바람’(기여암)으로 삼는 것은 양쪽의 조화를 고려한 것일 터이다. 저어기, 여헌선생님, 빈섬 밥값 제대로 했는지요? <4편에 계속>


글=빈섬 이상국<스토리텔러·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김윤규 한동대 교수·포항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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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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