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만남] ‘한국의 혼 누정’ 대표저자 한학자 양재 이갑규씨
한학자 이갑규씨가 20일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에 마련된 자신의 양정서당(養正書堂)에서 영남지역 누정(樓亭)의 의미를 설명하던 중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우리 민족에게는 한국인의 혼(魂)이 있습니다. 그 혼을 누(樓·다락)와 정(亭·정자)을 통해 깊숙이 들어가 밝혀 보고자 했습니다. 특히 영남지역 누정에 담긴 옛 선비들의 정신과 사상, 덕행을 조명했습니다.”
‘한국의 혼 누정(樓亭)’의 대표저자인 한학자 양재(養齋) 이갑규(李甲圭·55)의 말이다. 이갑규씨는 “이제껏 누정을 다룬 책은 건축물을 문화재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누정의 주인공을 소개하거나, 누정의 기문(記文) 등을 모아둔 정도였다. 저자들은 구전되는 이야기를 담거나, 다른 자료를 인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내용이 피상적이었으며, 오류도 없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그래서 한문으로 쓰여진 누정의 기록물이나 문집을 직접 점검하고, 한글로 풀어냄으로써 우리 선조의 정신세계와 속뜻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그는 기존에 소개된 자료를 피해 누정의 기문, 행장(行狀), 비문(碑文), 상량문(上樑文), 실기(實記), 문집(文集) 등을 철저하게 직접 번역해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이는 그가 어릴 적부터 한학에 매달린 한학자이기에 가능했다. 그의 집안은 영남지역에서 한학자 집안으로 유명하다. 경남 사천에 자리잡은 조부는 평생 후학 양성과 내성(內省) 수행으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면서 단발령에 항거해 자결로써 민족혼과 항일정신을 지켜내고자 한 유암(有菴) 이후림(李厚林)이며, 부친은 은동(隱洞) 이종섭(李宗燮)이다.
이 책은 2006년 5월부터 2007년 7월까지 영남일보에 연재된 ‘한국의 혼 누정’의 기사를 보충하고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책에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저술, 강학(講學), 은거 등을 목적으로 건립된 누정 가운데 선별된 60곳이 소개됐다.
이씨는 연재 기간에 공동저자인 영남일보 김신곤 동부지역본부장 및 김봉규 체육부장과 함께 누정에 매달렸다. 저자들은 주말마다 영남지역 곳곳의 누정을 찾아 사진을 찍고, 기록물을 채록하는 것은 물론, 누정 주인공의 후손을 찾아 문집 등 자료를 발굴했다.
한문으로 쓰여진 누정의 기록물
직접 점검하고 한글로 풀어내
우리 선조의 사상과 덕행 조명
안동 추월한수정·합천 뇌룡정 등
영남지역 누정 60곳 찾아 자료 발굴
소중한 정신문화유산에 담긴
한국인의 혼 일깨워
한국의 혼 누정// 이갑규·김신곤·김봉규 지음/ 민속원/ 460쪽/ 3만5천원 |
‘누’와 ‘정’이란 이름은 과거 한자문화권에서 공유됐다. 그래서 우리의 누정이 중국문화를 모방한 사대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누정은 취재과정에서 중국보다 그나마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의 누정은 문화혁명 시절에 모두 파괴된 뒤 덩샤오핑(鄧小平) 집권 이후 다시 건립됐기 때문이다.
옛날의 선비들, 즉 지식인들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처사(處士)로 지내면서 소박한 정자를 마련해 후학을 가르치고, 스스로 수양하면서 저술과 강학활동을 했다. 또 학덕 높은 스승이 머물던 곳에 제자나 후학들이 그 학덕을 기리는 누정을 건립, 인격과 학문을 닦는 장소로 삼기도 했다.
누정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옛 선비들의 이러한 값진 정신과 혼이 담겨 있는 곳이다. 그래서 후학과 후손들은 그 가르침을 이어받고자 했고, 그런 마음은 수많은 누정을 지금까지 보존하게 한 힘이기도 하다. 경치나 유흥을 즐길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혼이 깃든 누정은 특히 영남지역에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누정이 방치되면서 거기에 담긴 소중한 정신문화유산은 대부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누정이란 건축물 자체보다 더 소중한, 거기에 담겨진 선비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찾아보고자 시도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룬 누정은 퇴계 이황의 도학(道學)을 추모해 1715년 건립된 안동의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남명 조식이 1561년 창건해 강학하던 합천의 ‘뇌룡정(雷龍亭)’, 학봉 김성일 형제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안동의 ‘백운정(白雲亭)’,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1768년 지어진 구미의 ‘채미정(採薇亭), 신재 주세붕이 1543년 소수서원 학생들의 토론과 사색의 공간으로 지은 영주의 ‘경렴정(景濂亭)’ 등이다.
한학자 이갑규씨는 “서구문화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 사는 우리는 서구와 우리 것에 대한 혼돈을 넘어 우리 혼의 상실 속에 처해 있는 것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며 “이 글이 너무 고답적이라고 느낀다면, 아니 이해가 부족하다고 한다면 자신이 먼저 얼마나 서구화돼 있나 돌이켜 봄직할 것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 한국인의 혼이 되살아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김상진기자 sjkim@yeongnam.com
◆이갑규는 누구인가
1957년 경남 사천시 곤양면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한학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대구향교에서 25년째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며, 현재 대구대 중어중문학과 겸임교수와 한국국학진흥원 대구강원 주임교수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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