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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도심 속의 도사들…일상 속의 도사들…

2013-09-06

한국인 첫 명상센터 세운 박지명씨 40년을 올인
명상에 미쳐 히말라야 자락으로…십팔기에 미쳐 살림 거의 거덜내고…

직장이 초월의 공간이 되기는 어렵다.

일상의 논리는 환상의 논리와 동고동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30년 이상 지속되는 1기 일터에서 찌그러진 자신을 반듯하고 조화롭게 반죽해줄 성스러운 기운을 찾는다. 다시 말해 자기만의 ‘수호천사’를 찾는다. 어떤 이는 아침마다 약수터에 다녀와야 맘이 놓인다. 또 어떤 이는 새벽기도를 올리거나 향불 앞에서 108배를 올린다.

또 누군 틈만 나면 마라톤을 한다. 그렇게 세속의 시간과 조화를 이루고 싶어 한다. 일부는 직장을 버리고 심산유곡으로 은거하기도 하지만 대다수가 직장의 굴레로 굴러떨어진다. 일군의 사람은 도사(道士)의 자태로 세속도시를 주름잡기도 한다. 어찌 보면 산속으로 잠행한 도사보다 사람 속에 있는 도사가 훨씬 교훈적인지도 모른다.


한국인 첫 명상센터 세운
박지명씨 40년을 올인

출판사 대표 신성대씨
35년을 무예 보존 온힘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
송광사 매실 들여오고
무질부리가마 복원해

이들은 일상 속 도인의 풍모로 살아가고 있다.

20130906
히말라야 설산을 배경으로 명상중인 젊은 날의 박지명씨.

◆ 국내 요가명상의 리더 박지명씨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출신인 박지명 히말라야명상센터 겸 산스크리트문화원 원장.

40여년간 명상과 함께 지내왔다. 그는 류시화가 1980년대 인도발 각종 명상서적을 소개하기 전부터 선두적으로 초월·요가명상의 이론적 바탕을 구축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의문점을 갖는다. 이모가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태어나면 누구나 다 죽고 흙이 된다’는 평범한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엉뚱하고 황당한 질문의 연속. 집 안에선 유별난 그의 기질 때문에 훗날 종교인이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대학 시절엔 시를 짓고 엄청나게 독서를 했다. 하지만 그가 읽었던 많은 책이 오히려 더 큰 괴로움으로 밀려왔다.

그런 힘든 시간에 그에게 정신적인 구세주로 손을 내민 것이 바로 초월명상(TM)이었다. 비틀스 멤버도 네팔 카트만두의 수행자(구루)를 만나 시도했다는 그 초월명상이었다.

75년 초월명상은 서울과 대구 두 곳에서 오픈해 그는 대구센터의 지도자로 발전한다. 당시 국내에선 국선도 정도만 세를 갖고 있었고 훗날 돌풍을 일으키는 단학선원조차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명상으로 끝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79년 어렵게 비자를 받아 초월명상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로 갔다.

점점 인도의 요가명상에 심취한다. 북인도 히말라야 자락인 리시케시에 들러 평생의 스승이 되는 스와미 사르바다난드와 인연을 맺었다. 그가 안내한 산스크리트어 학교에도 입학했다.

91년에는 노벨평화상을 갓 수상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라마를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친견했다. 당시 그는 번역사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달라이라마에게 ‘삶의 목적이 뭔가’라고 질문했고 ‘행복’이란 답을 받았다.

이후 그는 50여차례 국내와 인도를 들락거렸다. 길게는 1년가량 인도에 머물며 인도 명상의 본질이 뭔가를 누구보다 철저하게 익힌다. 국내에 소개된 하타요가 대신 더욱 명상적이고 깊은 차원을 갖고 있는 ‘라자(왕)요가’를 직접 수행한다.

91년 서울 광화문 근처에 한국인으로선 처음으로 히말라야 명상센터를 차린다. 새로운 의식공간이었다. 화이트칼라에게는 신선한 뉴스가 됐다. 궁극적 존재, 마음이 실체를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인과 재계의 리더 등이 노크를 한다.

그는 국내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산스크리트어 전문가. 지금까지 50여권의 각종 명상 관련 서적을 펴냈는데 ‘요가 황금빛 만남’ ‘요가수트라’ ‘우파니샤드’ 등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명상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 경전들도 원전으로 번역하였다.

그는 요즘 국내 명상문화가 너무 상업적이고 교조적으로 흐르는 걸 경계한다. 한때 그 자신도 명상에 환멸을 느껴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고 인도로 갔다가 고향인 대구에 머물렀다.

“요즘은 웰빙을 생각하고 정신적인 평안을 찾는 명상을 갈망하는 인구가 점차 늘고 있어요. 특히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시에서는 그러한 갈망이 더 강하죠. 현대의 사회구조 자체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불안하고 항상 위기감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불안감이 자신의 균형을 깨뜨리고 스트레스가 절정에 달해 결국은 병을 얻게 되죠. 다들 외부적으로 보면 멀쩡하나 사실상 내부적으로는 아주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방법이 명상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가 명상에 입문하는 사람에게 명상가한테 속지 않는 법을 살짝 귀띔해준다.

“이론 설명보다 초능력적 결과만 반복해서 말하면 양질의 명상가는 아닙니다. 보자마자 자신은 깨달은 자이고 이런저런 초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문제가 있어요. 자기밖에 제대로 된 명상을 할 수 없다는 말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더 높은 단계의 수련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걸 강조하는 것도 무리수가 많아요. 일단 명상가를 만나면 삶의 목적이 뭔가를 물어보세요. 다음에는 그가 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뭔가도 물어봅니다. 조금만 분석하면 그가 진정한 명상가인지 파악할 수 있어요.”


20130906
출판사 사장으로 전통무예 십팔기 보급에 헌신 중인 신성대씨


◆ 십팔기에 미친 출판사 대표

국내 출판계에서 가장 돈키호테 같은 사장은 누굴까.

단연 동문선 대표 신성대씨를 꼽는다. 첫인상이 꼭 중국 액션스타 이연걸 같다. 젊은 시절 7년간 외항선 마도로스였다. 바다 사내였던 그가 동양학 등 인문과학 서적을 펴내고 싶어 느닷없이 바다를 버리고 서울 인사동에 나타난다.

84년 서울 인사동에 출판사 동문선을 연다. 지금까지 600여권의 각종 인문도서를 펴냈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상관 안 했다. 영업사원도 없다. 신문광고도 안 낸다. 5명의 직원이 한 달 만에 인문서적 12권을 펴낸 적도 있다.

그런 성정 덕분에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무예가 뭔지 전수해준 원로 무예인 해범 김광석이다.

사명감이 생겼다. 일제가 퍼뜨린 ‘식민무예’ 자리에 고사 직전인 ‘민족무예’ 십팔기를 제자리에 갖다놓고 싶었다. 그래서 평생을 걸었다. 35년이 지나갔다. 출판사 옆에 십팔기 전수관 격인 ‘무림 사랑방’을 열었다. 거기가 전통무예 십팔기보존회 사무실이다.

출판사 사무실 한편엔 창과 검, 무복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가 옛 문헌을 토대로 직접 깎고 색칠해 재현한 것이다. 그는 현재 보존회 회장이다. 전통무예십팔기전국대학생연합을 결성했고, 국방부 전통의장대에 십팔기를 전수한다.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학교로 찾아가는 십팔기’도 챙겼다.

최근엔 십팔기를 푸대접하는 한국 무림을 향해 쓴소리를 한 ‘무덕(武德)’을 발간해 화제가 됐다. 또한 한국 최고의 무예교본인 ‘무예도보통지’도 번역출간했다.

“무(武) 명칭도 나라마다 다르죠. 한국은 ‘무예’, 중국은 ‘무술’, 일본은 ‘무도’라 해요.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22대 정조의 어명에 따라 편찬됐어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정조는 이덕무와 박제가에게 완벽한 무예서 편찬을 명했지요. 이들은 신라 화랑이 가졌던 본국검 등 한국 무예, 중국의 무술, 일본의 무도 흐름을 새로운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처음에는 명나라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서 6기를 갖고 온 뒤 이어 전통 무예인 본국검, 예도, 제독검, 쌍검, 월도, 협도, 죽장창, 편곤, 여기에 마상 6기, 이 밖에 일본의 쌍수도, 왜검, 왜검교전 등도 끌고왔어요. ‘십팔기’란 명칭을 만든 사람은 사도사제. 무예도보통지에는 십팔기 이외에도 기창(騎槍)·마상월도(馬上月刀)·마상쌍검(馬上雙劍)·마상편곤(馬上鞭棍)까지 포함 모두 22기가 실려 있습니다.”

십팔기 때문에 그의 살림도 거의 거덜났다. 뜻 있는 독지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처지다.


20130906
경제학과 교수이면서 대구에 송광매 붐을 일으킨 권병탁씨.


◆ ‘매실전도사’ 권병탁 전 영남대 교수

권병탁 전 영남대 경제학과 교수.

같은 대학 교수들조차 그의 정체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괴짜 교수’.

일본학자의 ‘한국인은 철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평생 국내 주요 제철유적지 탐색에 나선다. 2008년 하나의 꿈을 이룬다. 한반도 철기문화 형성의 토대를 증명하는 ‘무질부리(주물)가마’를 대구시 동구 덕곡동 송광매기념원 옆에 복원한다.

그것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원예학자들은 그가 1980년 전남 송광사에 있는 500년 고매의 매실을 문익점처럼 대구로 갖고 와 송광매의 신지평을 연 것도 높게 평가한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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