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다산면 곽촌리와 달성 다사읍 죽곡리 연결)
대구지역 금호강의 옛 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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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경북여고 학생들이 대구 북구 조야동으로 소풍을 가면서 금호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가 앙산 장원식씨 제공> |
1918년에 제작된 일제강점기 지형도를 보면 대구를 지나는 금호강에는 복현, 검단, 무태, 달천 등 총 10개의 나루가 등장한다. 당시 팔달교와 금호교(경부선 열차 교각)가 이미 건설됐지만 나루터도 함께 보인다. 금호강은 낙동강에 비해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적었다. 금호강은 대구에서 여러 지천을 만나 낙동강에선 호수와 같이 넓어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했다.
◆강정나루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와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옛 강정리)를 연결했던 나루다. 강정나루는 곽촌나루라고도 불렸으며, 금호강과 낙동강 두물머리에 위치했다. 현재 강정고령보의 물문화관인 ‘디아크(The ARC)’ 자리라고 보면 된다. 강정나루가 있던 곳에는 조선시대 정자인 부강정(浮江亭)이 위치했다. 부강정은 화원읍 성산(城山·화원토성)에 있던 금강정(錦江亭)과 마주 보며 위치해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통일신라시대 아홉 차례나 화원 구라리(九羅里)에 들른 경덕왕은 낙동강 대구 제1경인 금강정과 부강정을 배로 오가며 풍류를 즐겼으리라.
‘만박삼파반 귀범차가정(晩泊三派畔歸帆此可停) - 날이 저물어 삼파나루로 돌아와 범선을 정박시키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대구지역 의병장이던 모당 손처눌은 서사원, 장현광 등 대구지역 유림과 뱃놀이를 즐기며 한시를 남겼는데 강정나루를 삼파진(津), 즉 ‘세 갈래의 물이 합치는 강나루’라고 표현했다. 강정나루는 강창교가 생기면서부터 쇠락해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이곳 주변에는 강정고령보, 디아크, 달성습지, 화원토성, 사문진나루터 등이 있어 수변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최원관 다사향토문화연구소장은 “사문진과 디아크를 연결하는 유람선을 띄워 옛 뱃길을 복원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창나루
대구시 달서구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를 연결하던 나루였다. 조선시대 대구부의 세곡을 보관하던 곡식창고인 강창(江倉)이 있어 강창나루로 불렸다. 1971년 강창교가 생기기 전, 성주와 대구를 연결하던 수로교통의 요지였다. 작은 나룻배가 운영됐으나 버스가 운행되면서 철선이 등장해 버스까지 실어 날랐다고 한다. 1960~80년대 파호동 강 인근에 주막을 비롯해 매운탕식당이 즐비했다.
◆선사진
선사진(仙査津)은 현재 다사읍 다사로(路) 이현삼거리 부근 금호강 연안에 있던 나루터다. 서사원, 손처눌 등은 금호강 선사암에서 배를 띄워 낙동강까지 갔다. 현재 강 건너편에 다사읍 세천리 성서5차산업단지가 있다. 이현삼거리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다사면사무소가 있었다. 그 흔적으로 면사무소 자리에 가이즈카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현삼거리는 대구에서 성주로 가기 위한 길목이다. 대구에서 서쪽 마천산 마현령을 넘어야 성주로 갈 수 있다. 마현령은 다사읍 이천리와 하빈면 현내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최원관 소장은 “임진왜란 때 화원의 의병장 월곡 우배선이 금호강 달천진에서 왜병과 전투를 벌이다 후퇴하면서 이곳을 지나 마현령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배선 의병은 왜군 2명을 죽이고 4명이 전사했다”며 현재의 이현고개를 마현령으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천나루
이천 또는 이내는 금호강 하류를 일컫는 별칭이다. 낙재 서사원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이락서원이 이천 나루 위에 있다. 현재 이천나루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 또한 나룻배 선착장이었다.
“이천, 달천, 박곡을 지나는 다사로를 ‘이달박 벚꽃 10리길’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최원관 소장은 “19세기에 그린 금호선사선유도에 작은 다리가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이천진(伊川津)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달천나루
달천진은 대구읍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빈현 동쪽 16리 금호강 하류에 있다’고 나온다. 달천진은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와 다사읍 달천리를 잇는 나루였다. 물돌이를 치는 달천리 쪽에는 현재 제방이 튼튼하게 축조된 가운데 넓은 들을 형성하고 있다. 제방이 없다면 강물이 안쪽으로 넓게 들어와 사방으로 퍼졌을 터이다. 이곳까지 소금배가 들어왔다고 하니 금호강 수심이 꽤나 깊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달천나루는 강물이 불었을 땐 나룻배를 이용했고, 강물이 적을 땐 목교로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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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어미와 해랑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따라 이름을 지은 해랑교. 이곳은 한때 성주와 대구를 잇는 포구였다. |
◆해랑개
해랑개는 해랑포라고도 불린다. 김해와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범선이 이곳에 정박해 수산물을 하역한 곳이다. 해랑개는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다사읍 박곡리와 서재리를 연결하는 나루였으며 대구와 성주를 연결하는 최단거리 구간이었다. 대구 쪽에는 방천리 방내촌관방원(院)이 있었으며, 성주 쪽에는 박곡리 박실원(院)과 이천리 마천원(院)이 있었다. 원(院)은 고려~조선시대 주요 도로상에 설치한 일종의 여관이라 할 수 있다. 박곡리 해랑개 마을에는 해랑부부, 해랑어미 사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전설을 따라 해랑교라는 다리의 명칭이 생겼다. 한때 시커먼 폐수가 흘렀으나 지금은 플라이낚시꾼이 몰릴 정도로 물이 맑아졌다. 해랑교 아래는 물이 얕은 여울목이다. 해랑부부가 놓았다는 옛날 징검다리는 찾아볼 수 없다. 해랑교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올라가면 경부선 금호강철교가 나온다. 1918년 지형도에 보면 그 아래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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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변나루터는 무태에서 가장 오래된 나루터로 인근에 세심정이란 조선시대 정자가 있었다. |
◆무태나루/동변나루
무태지역 북구 동변동 현 유니버시아드선수촌 아파트 109동 쪽 옛 세심정 자리에 나루터가 있었다. 동변검단나루라고도 불린 이곳은 대구읍지에도 나오는 나루터로 역사가 꽤나 오래됐다. 구자현씨(73)의 증언에 따르면 서변동 쪽에도 현재 무태교 자리에 나루터가 있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배를 타고 대구지역까지 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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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금호제2교 아래가 바로 검단나루터다. |
◆검단나루
검단뱃나들 또는 검단나루터라고도 불렸다. 대구시 북구 검단동과 불로동을 잇는 나루로 경부고속도로 금호제2교가 생기면서 나루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검단나루는 경상도지리지에 나오는 저탄진(猪灘津)일 가능성이 크다. 인근에 화담이 있다.
구본욱 위클리포유자문위원은 “금호강에서 물도리가 심하게 치는 곳으로 ‘저(猪)’ 자에는 ‘돼지’의 뜻도 있지만 ‘물이 괸 웅덩이’란 뜻도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았던 소유정과 압로정이 인근에 있어 세심정에서 압로정까지 선유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복현나루
전영권 위클리포유 자문위원이 공개한 1918년 지형도에 따르면 복현나루는 현재 성보학교와 신암선열공원 아래에 위치했다. 아양교가 생기기 전 복현동과 해안현을 이어주던 최단거리 구간이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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