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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승려가 해탈과 상관없이 계율만 지켜주면 사부대중은 잘 돌아가게 돼 있다”

2015-05-22

■부처님 오신 날 특집‘길’ 위의 두 스님

20150522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허름한 농가 한 언저리에 야생화처럼 피어 있는 인오선원. 대연 선원장이 선원 바로 옆 허름한 가옥의 툇마루에 앉아 대낮의 마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천 인오선원 대연 선원장

승려 한 명 만드는 데
10명의 승려 필요

승려가 직업이 되어선 곤란하다
수행이 생계수단 되어서도 안돼
불자가 안 오면 탁발 각오해야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는데
이것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젠 다시 계율로 돌아가야 한다
승력와 불자를 동시에 살리는
최소한의 보호장치가 계율이다


묘향사 요사채에서 하룻밤을 청했다. 모처럼 스마트폰을 끄고 환한 어둠을 만지작거리다가 잠들 수 있었다. 잣죽으로 아침 공양을 했다. 혜민 스님의 예초기 소리를 뒤로 하며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인오(印悟)선원으로 향했다. ‘인오’는 두 은사 스님의 아호에서 한 자씩 따왔다.

선원장인 대연 스님은 혜민 스님과 여러 모로 대조가 되었다. 혜민 스님이 ‘참고서’ 같다면 대연 스님은 ‘교과서’ 같은 노선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을 합치면 신불교가 태어날 것 같았다.

오전 11시 선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갓 예불을 마친 스님은 조리사로 변해 있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다. 오늘 추천 메뉴는 카레와 묵은지다.”

주방에 앉아 먼저 온 불자와 함께 공양했다. 다부진 스님의 몸짓은 호방하면서도 꼿꼿했다. 언변은 거침없었다. 천진난만한 미소 속에 면도날 같은 예리한 안광이 스며 있었다. 논지를 분명히 할 때는 갑자기 눈빛이 형형해졌다.

그는 국내파보다 ‘해외파 선승’. 10년쯤 외국을 떠돌았다. 인도, 미얀마,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프랑스 등 현지 사찰에서 각국 승려를 대상으로 영어 법문을 했다. 툭하면 외국에서 초청 법회를 청한다. 그는 ‘인도통’. 태어나서 열반에 들 때까지, 부처의 행적을 유적지별로 정리했다. 지도와 해설까지 첨부한 인도 올가이드북인 ‘인도에 갈 때는 숟가락을 가져가세요’를 2009년에 출간했다.

그는 시종일관 계율중심·초기불교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강조했다.

“돈 버는 건 불자에게 맡겨라. 승려는 해탈과 상관없이 그냥 계율만 지켜주면 된다. 그럼 사부대중(비구·비구니·우바이·우바새)이 잘 돌아가게 돼 있다. 사실 요즘 스님이 너무 프로답지 못하다. 절집 사정이 궁해서 그런지 자꾸 불법은 뒷전인 것 같다. 영가 천도, 빙의, 귀신, 사주명리학, 49재 담론만 무성하다. 절집인지 무당집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다. 불자도 프로가 있고 아마추어가 있다. 승려도 프로가 있고 아마추어가 있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 본다. 아마추어와 아마추어가 만나면 어떻게 되겠나. 사찰이 아니라 ‘사업체’로 돌변한다. 그럼 승려는 불법을 전하기보다 자기 절 마케팅에 더 열을 올리게 된다.”

그가 갑자기 기자한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느냐”고 묻는다. 답을 못했다.

“‘삼사칠증(三師七證)’이란 말이 있다. 비구계(일명 ‘구족계’라 한다. 6개월 행자 이후 예비 승려인 사미계를 받고 4년 승가대를 나와야 비로소 정식 승려가 된다)를 받을 때 있어야 하는 것은 세 사람의 스승과 일곱 명의 증인이다. 3사는 계화상(바로 계를 주는 분)·갈마사(계 받는 취지를 대중에게 알리는 표백과 갈마문을 읽는 분)·교수사(위의와 작법을 가르치는 분), 7증은 덕이 높은 7분의 스님을 가리킨다. 승려 한 명 만드는 데 10명의 승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 너무 쉽게 스님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스님이 부처의 본질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도와 잡담이나 하고 자기도 감당 못하는 뜬구름 잡는 구름 같은 법문을 할 수밖에 없다. 무늬만 불자인 사람은 그게 불법의 전부인 줄 착각한다.”

◆ 승려는 직업이 아니다

“승려가 직업이라고 보는가?”

“특수 직군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가 정색한다.

“승려는 절대 직업이 아니다. 직업이 되어서도 안 된다. 수행이 절대 생계 수단이 되어서도 안된다. 한국에 와 보니 대다수 승려가 밥그릇을 걱정하고 있더라. 밥이 아니라 법(계율)을 사수하면 절대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불자가 안 오면 탁발할 각오해야 된다.”

그는 비판의 강도를 더 높였다.

“요즘 돈 많은 속인이 법당을 짓고 염불·예불 잘하는 승려를 고용하기까지 한다. 물론 정통 종단의 스님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불교의 권위가 너무 추락했다.”

그는 이제 불교의 기본을 찾을 적기라고 주창한다.

그러면서 58년 W. 라훌라가 펴내고 그가 새롭게 번역한 ‘붓다의 가르침’을 끄집어 냈다.

붓다의 한 얘기를 읽어주었다.

“인간은 제 각각 믿음을 갖고 있다. 만약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라고 한다면 진리는 그 한도 내에서만 유지된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이것만이 진리고 그 이외의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절대적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나의 사물에 집착해서 다른 사물이 열등하다고 멸시하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족쇄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성직자가 자기 믿음만을 절대화하려고 몸부림 치는가. 현재 이슬람국가(IS)의 무차별 테러는 뭘 말하려는 걸까.

“붓다는 형이상학적 쟁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붓다는 그걸 ‘견해의 황무지’로 간주했다. 가령 우주는 영원한가, 우주는 유한한가 같은 질문에는 침묵했다. 대신 ‘삼법인(三法印)’과‘독화살론’을 내민다.

◆ 삼법인의 가르침

“삼법인은 붓다의 궁극적 가르침이다. ‘세 가지 불변의 진리’라는 말이다. 그것은 일체개고(一切皆苦)·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다. 일체개고는 ‘시간적으로 덧없고 공간적으로 실체가 없는 현상계에 착을 두어 꺼둘리는 것이 고(苦)’란 뜻이다. 제행무상은 ‘일체 사물과 인간, 그리고 그 마음의 형상이 12연기에 의해 시시각각 생멸변화할 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제법무아는 ‘만유의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실로 나라 할 만한 실체가 없고 어떤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가 어떤 조건에 의해서 사라진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만 잘 성찰하면 불법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붓다는 ‘세상만사가 12연기(緣起)로 순환하고 있을 뿐 실체는 없다’고 했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는데 ‘이것밖에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12연기론은 마치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 같다. 만약 봄이 ‘계절은 내 소유’라고 고집하면 나머지 세 계절은 어찌 되겠는가. 인간만이 ‘이건 내 것’이라고 소유권을 고집한다. 고집하지 않으면 ‘자연’이 되는데 고집하면 속세로 추락한다. 집착과 고정관념이란 무명에서 사물을 본다면 과연 바른 견해(正見)가 가능하겠는가.

붓다는 해탈로 가는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제시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념(正念)·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이다. 이게 바로 수행의 기본이자 계율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 다시 계율로 돌아가자

그는 현재 방편으로 전락한 ‘계율 살리기’에 사력을 다한다.

“계율이 결국 승려도 불자도 동시에 살린다. 계율은 ‘덫’이 아니다. 그건 불교를 지키는 최소한의 보호장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계율 지킴을 하나의 통과의례로 치부하고 있다. 계율 없이 수행도 없다. 60년대초 비구와 대처승 후유증 때문에 이후 한국 불교가 양적발전에만 치중하고 질적발전은 등한시한 것도 사실이다. 늦은 게 아니다. 이제 양에서 질의 불교로 가야 한다. 그 수단이 바로 계율이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중 노릇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생계가 걱정되면 승복을 벗어라. 사회인이 되어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어라.”

얼마나 많은 한국 승려가 이 말에 수긍할까.

그는 ‘신통력’이란 대목에 유달리 쓴소리를 가한다.

“붓다도 제자로부터 신통력을 보여달라는 주문에 항상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보여주지 않았다. 이유는 그랬다. 매일 새로운 신통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신통력만 중시하는 제자들은 실망해 떠날 것이고 신통력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더 높은 차원을 원할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신통력은 보여줘도 문제, 안 보여줘도 문제다. 그래서 붓다는 신통력을 무시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통력 담론이 우리 불자를 흥분시키고 우리 절집을 왜곡시키는가. 함께 고민해보자.”

대연 스님은 말미에 이런 제안을 했다.

“신도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5계가 있다. 이젠 신도가 아니라 승려가 5계를 솔선수범할 차례”라고 잘라 말했다. 신도5계는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도둑질하지 말기)·불사음(不邪淫·음란 행위 금지)·불망어(不妄語·거짓말 않기)·불음주(不飮酒).

이 주문이 비단 승려에게만 해당되겠는가. 한국 모든 성직자가 숙지했으면 싶다.

사부대중=비구·비구니·우바이·우바새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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