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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길 위에서 만난 詩

2015-11-05
[여성칼럼] 길 위에서 만난 詩
이규리 (시인)

교보생명 본사 건물 글판
25년째 감동 詩句 내걸려
수많은 사람들 위로하고
성찰과 희망의 시간 제공…
이런게 바로 인문학이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낙엽은 옅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밟을 때의 촉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춤사위와 함께 이미 바닥에 깔린 자잘한 느티나무, 벚나무 그리고 노란 은행잎은 길 위에 한바탕 축제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경계석에 몰려 있는 낙엽들을 두 손으로 끌어모아 흩날려 보았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색색의 잎들, 흩어지며 내리는 저 조락들은 길 위에 쓴 또 다른 언어이고 노래였다.

몇 년 전부터 길에 대한 서사가 되살아나 우리에게 따뜻한 정서를 주고 있다. 각 도시마다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테마의 문화사업을 전개해 침체돼 있던 인문학에 대한 인식을 되찾아주려 하며 동시에 교실 밖에서의 현실감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삶의 터전인 현장의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인문학의 새로움을 발견하자는 취지인 것이다. 고맙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사학이든 철학이든 말이다.

필자 역시 인문학의 중요성을 문학과 연계, 현장 학습을 통해 몇 차례 강의하면서 여러 길 위에 서 보았다. 즉 인문학이 책 밖으로 나온 것이라 표현하면 더 리얼리티가 있겠다. 인문학이라 하여 어떤 이론에 직면하는 게 아니다. 서두에서 서술한 길 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고 어떤 정서가 일어나는 일도 인문학의 하나이며, 그 잎의 수분 정도에 따라 청각을 가늠해보는 섬세함도 역시 인문학적인 사고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고가 대상에 대한 사랑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우리가 서로 만났고 사랑을 했고 어느 날 길 위에서 우리는 헤어지기도 했다. 그때도 길이 함께였다. 어떤 길에서는 왁자한 삶의 악다구니를 만나기도 했으며, 어느 골목길에서는 누가 갖다놨는지 예쁜 화분이 좁은 길을 환하게 해주었고, 어떤 길에서는 창문에 써 붙인 한 줄의 글을 만나기도 했다. “이곳에 비치는 햇살을 당신이 가지세요”라는 글귀나 “당신이 활짝 웃었기 때문에 나는 아프지 않았어요(암 투병 중인 사람)”란 쪽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도 보았다. 말이 범람하는 시대이나 때론 누군가 써 놓은 진정 어린 한 줄의 글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 무너지던 마음을 다잡아 선량한 의지를 다짐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글귀를 내놓자는 뜻에 따라 교보생명 본사 건물에 글판이 걸린 지 25년이 되었다고 한다. 석 달에 한 번 시구를 바꿔 거는데 줄잡아 하루에 광화문을 오가는 사람이 100만 명, 차가 25만 대쯤 된다고 하니 한 번씩만 읽는다 해도 그 숫자는 어마어마하며 그 노력 역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글판을 장식했던 시구들을 보면 ‘기다리지 않아도 너는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너는 올 것이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있으며, 가장 애송되었던 시구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한다.

그 한마디의 시구들은 외로운 사람을 위로했을 것이고,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다시금 돌아보는 생각의 시간을 갖게 하였을 것이며, 사랑으로 상했던 이들에게 새살이 돋는 회복의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인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삶과 사람 사이에서 마음의 온기를 되찾는 그런 일,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유순하게 사랑을 담는 기쁨을 가진다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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