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그 소리‘LP’…대구의 마니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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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동굴족 같은 포스로 참빗처럼 도사린 LP 음반을 골라내 단골과 살가운 눈빛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플레이의 음악지기 강씨. 그는 ‘편리지상주의’를 살고 있는 디지털족에게 느림과 수동의 미학을 풀씨처럼 전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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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전성기를 거치며
30년간 서울서 활동
2013년 돌연 대구행
LP음반 1만여장으로
LP카페 오픈
손님 가슴 울리는 곡
제대로 골랐을 때
테이블서 터지는 탄성
그는 그것을 즐긴다
◆ 리플레이 LP 이야기
강호성씨는 마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속초를 거쳐 서울 구로공단 근처에 안착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빽판(복사한 저급 LP판)에 미친 아이’였다. 영등포구 신길동 장흥고 졸업 시절 그의 방에는 300여 장의 LP가 있었다.
대학은 이미 ‘멀어진 패’. 갈수록 음반의 포로가 된다. 일단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서울역전 한진호프에서 알바를 한다. 도처에 장인급 다운타운 DJ가 포진해 있었다. 업장에서는 음악을 틀 기회를 주지 않았다. 뮤직박스 안에 들어가서 판에 묻은 지문을 면포로 닦아내고 재킷 안에 넣어 제자리에 넣어두는 게 주업무였다.
“관찰해 보니 이 바닥 DJ가 폼만 잡고 음악보다 말이 너무 앞선 것 같아 실망이 점점 커졌어요.”
마침 누나가 영등포역 근처에서 경양식당을 오픈한다. 마침내 그도 할 일이 생겼다. 집에 있는 판을 모두 갖고 와 누나 가게에서 신나게 틀어준다. 하지만 음악 수준은 아직 올챙이급. 가게 근처에 두 고수가 있었다. 희귀판을 많이 보유한 송 카페와 영상 디스크 시대를 일찍 열어갔던 미진 음악다방 주인이 당시 그의 롤모델. 틈만 나면 거기로 갔다. 송 카페 사장이 그를 음악적으로 많이 챙겨준다. 이때 음악 감상에 대한 기본기를 다질 수 있었다.
“원판과 빽판 음질의 차이, 왜 LP음반은 와인병과 반대로 눕혀선 안되고 세워서 보관해야 되는가도 알게 됐습니다. 눕혀두면 플라스틱이 휘게 되죠. 잘 틀어주지 않고 방치하면 골이 퇴화되고, 먼지를 잘 닦아내지 않으면 잡음투성이 음반으로 추락하고 말죠.”
월간 팝송과 매주 발표되는 빌보드 차트를 신줏단지처럼 품고 다녔다. 그걸 통해 미국과 영국 팝송의 흐름을 공부해나갔다.
◆ 강호성…신촌에 입문하다
제대 직후 87년 신촌 기차역 근처(이화여대 후문 쪽)에서 록 카페 ‘ROCK’을 오픈한다.
이 무렵 한국 음악계는 잠시 록밴드 지상주의에 돌입한다. 이와 맞물려 돌아간 ROCK은 80~90년대 ‘신촌문화’ 형성에 한몫을 했다. ROCK은 명동의 통기타 라이브 클럽의 양대산맥이었던 ‘쎄시봉’(69년 무교동에서 폐업)과 DJ 이종환이 꾸려갔던 ‘셀부르의 우산’(73년 서울 종로 화신 앞 네거리에서 출발. 명동에서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짐) 시대와 선을 그었다. 명동의 통기타 문화를 신촌 록문화로 치환시키는 데 일조를 한 것이다.
ROCK은 70년대 후반 신촌시장에서 동교동 가는 길에 있었던 ‘츄바스코’, 연세대 굴다리 근처 ‘레드 제플린’에 이어 신촌에서 세 번째로 생긴 언더 뮤직맨을 위한 ‘LP바’였다. 뒤이어 록 뮤직을 앞세운 ‘우드스탁’과 ‘러시’는 물론 90년대 홍대 클럽의 가교였다. 이때는 LP가 CD로 슬금슬금 교체되기 시작했지만 신촌은 역시 LP 전성기였다. 그를 더 록 카페에 몰두하게 채찍질 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정선과 함께 한국 블루스 음악의 개척자인 엄인호씨다. 86년 4월 그의 가게에서 직선거리로 400여m 떨어진 연세대 굴다리 근처 라이브 록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고(故) 김현식, 이정선, 한영애가 모여 국내 첫 블루스 공연을 했다. 그 공연을 계기로 ‘신촌블루스’가 탄생한다. 록과 블루스의 결합, 그 경계에 그도 있었다.
그는 음악 선곡에 있어서만은 ‘독재자’ 같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음악은 손님이 아무리 간청해도 틀어주지 않는다. 고객이 왕이 아니고 강호성이 왕이었다. 단골은 시나위 리더 신대철, 언더그라운드 포크싱어였던 이원재, ‘누구 없소’의 작곡가 윤명운 등이었다.
2년여 만에 록은 연대 앞으로 이전한다. 이때부터 음악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 가요의 경우 송창식, 김정호의 노래, 대학가요제 수상곡 등도 허용했다.
“여기가 개인 뮤직룸이 아니라는 걸 점차 알게 됐어요. 내 취향의 곡은 손님이 없는 시간에 몰아 틀어봅니다.”
90년대가 이슥해지자 록문화가 하향길을 걷는다. 록이란 상호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전국이 디스코 열풍에 빠진다. 젊은이는 음악 감상보다 광란적으로 춤을 추고 싶어 했다. 당국은 록이란 단어를 불온하게 여겨 사용을 금지했다. 그래서 71년 사망한 전설적 록 뮤지션인 짐 모리슨이 이끌던 그룹 ‘도어즈(Doors)’를 새로운 상호로 결정한다.
도어즈를 96년까지 하다가 갑자기 영화에 심취한다. 영화를 위해 10년 끌고 오던 카페를 접는다. 1년간 영화 근처를 서성거리지만 자기 삶이 안 된다. 다시 신촌으로 돌아와 ROCK을 재오픈한다. 당시 7천여 장의 LP, 500여 장의 CD, 200여 장의 영상 디스크 등이 있었다.
이때부터 소리의 배후를 듣게 된다. 또한 존 콜트레인, 아트 블래키, 몽크 등 재즈 뮤지션은 물론 BB 킹, 영국 블루스의 거장 에릭 클랩튼과 알렉시스 코너 등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나간다. 파워에서 율조와 관조의 음악으로 터닝을 하게 된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신촌 록카페는 홍대클럽에 기운을 뺏겨버린다. 90년 김현식이 죽고 연이어 김광석이 갔다. 신촌은 가난한 로커가 깃들기에는 너무 상업적이었다. 뮤지션들도 다들 자립할 정도로 유명해져버렸다. 그는 너무 오래 지하공간에 있어 음습해졌다. 신촌 매너리즘에도 빠져있었다.
◆ 대구에 상륙한 리플레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작심하고 2013년 1만여 장의 LP, 2천여 장의 CD, 500여 장의 영상 디스크를 품고 대구로 온다.
역시 LP 카페는 원목의 느낌이 지배해야 된다. 바닥은 전체 집성목으로 깔았다. 천장고도 를 10m 가까이 높여 1층과 2층을 수직으로 통하게 했다. 2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음악을 듣는 느낌을 강조했다. 사진, 액자 등을 너무 지저분하게 많이 부착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전면에 흑색과 홍색이 교차하는 남녀가 차 위에서 키스하는 벽화를 그렸다.
바텐에는 예수의 12제자처럼 모두 12개의 안착감이 있고 음악 감상에 최적의 각도를 가진 1인용 바텐 의자를 배치했다.
한여름에 오픈했다.
서울에서의 록 카페의 전통을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대구 사람에게 어떻게 각인시킬 것인가. 그걸 놓고 후배와 많은 난상토론을 했다. 술을 많이 팔아야 하지만 일단 음악이 받쳐주지 않으면 리플레이는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음악의 스펙트럼을 너무 ‘강호성식’으로 고집해서는 곤란하다고 봤다. 대구에 맞는 록뮤직을 다시 골라내기 시작했다.
“조사를 해보니 수성못 주점가의 음악이 너무 손님 위주이고, 제대로 된 라이브클럽도 없는 상황이고, 그것도 오부리밴드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더군요. 대다수 인터넷에서 음원을 내려받아 무작위로 수돗물처럼 음악을 들려주더군요. 주인도 손님도 음악을 이방인처럼 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음악은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했죠.”
일단 시대와 역행하자고 결심한다.
청년백수는 다들 미래가 불안했다. 그들에게는 어쿠스틱한 기운이 필요했다. 그래서 들국화의 리더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를 자주 틀어주었다. 그 곡이 나가면 실내 분위기가 안온해진다. 내부가 용광로처럼 뜨거우면 헤비메탈로 적셔주고 허전하면 블루스나 보사노바 연주로 충전해준다. 또한 웬만한 마니아가 아니면 접하기 힘든 제3세계의 곡들을 신청곡 사이사이에 삽입해주었다. 숨은 고수가 하나둘 기웃거렸다. 그들이 원하는 곡은 물론 그것의 다른 버전까지 들려주었다.
“예전에는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곡을 틀어야 된다고 고집했지만 대구에 와서는 생각을 바꾸었어요. 손님의 곡도 반, 내 곡도 반 까는 식으로 갔어요. 신청곡의 울림에 맞는 걸 틀어줘 적중하면 테이블에서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그게 정확하게 들리죠. 저는 그걸 즐깁니다. 어떤 때는 손님이 더 멋진 곡으로 저를 위협할 때도 있죠.”
매일 밤 리플레이는 LP 배틀장으로 변한다.좋은 징조였다. 여럿보다는 혼자 아늑하게 앉아 그의 음악을 정독하는 단골이 차츰 늘어났다.
“대구는 보수적이지만 파고들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마니아는 좀처럼 자기 자랑을 안 해요. 그러니 고수가 없는 줄 아는데 정말 열심히 하면 그들이 먼저 알고 저를 찾아오더군요.”
어느 날 흥건하게 취한 한 손님이 송대관의 ‘네 박자’와 진성의 ‘안동역에서’를 부탁했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틀까 말까’를 놓고 고민하다가 틀어주자로 맘을 먹는다. 그의 음악적 너그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그날 손님들은 그 곡을 단번에 소화해버렸다. 다들 그게 ‘리플레이의 내공’이라고 해석했다.
분위기가 되면 이난영의 초판 ‘목포의 눈물’도 날린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끌어올 수 있는 음원 리스트는 아직 거부한다. 힘들더라도 직접 사다리 위에 올라가 LP 음반을 골라 내려온다.
음반에 담긴 20여 만 곡에 달하는 곡의 특징을 그는 ‘비교음반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방송국 DJ조차 모르는 사각을 파고드는 음악이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출렁거린다. 대구의 추억도 ‘리플레이’ 된다. 수성구 두산동 712. (053)768-0711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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