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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북 영덕 신돌석 장군 유적

2017-03-03

장군 고향집엔 봄이 불붙듯 매화가 파르르

20170303
영덕 축산면 도곡리 일명 복디미 마을에 있는 신돌석 장군 생가. 1995년 복원했으며 경북도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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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조성된 신돌석 장군 유적지. ‘우국’ 시비 너머 단 높인 땅에 장군의 사당 충의사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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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장군의 사당 충의사.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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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영정. 친척 중 많이 닮았다는 인물을 모델로 제작했다.

“장군님, 봄꽃이 피었어요.” 꽃 보자, 탄성보다 외침이 먼저였다. 망치 같은 바람이 전국을 두들겼던 날, 이 안온한 마을은 바람도 없는 봄이었다. 복디미 혹은 복더미라 불리는 마을, 영덕의 축산면 도곡리. 거기 파르르 화르르 피어난 매화가 최초의 봄으로 와 있었다. 구한말 의병대장 신돌석(申乭石) 장군의 고향집 앞이었다.

속칭 ‘복디미’로 불리는 축산면 도곡리
낮은 구릉에 감싸인 남향의 4칸 초가
1850년 무렵 父 신석주가 터 잡은 곳
의병에 진 日 수차례 불…1995년 복원

마을 초입 유적지에 장군 ‘우국’詩비석
단 높인 사당 ‘충의사’내 위패와 영정


◆도곡리 복디미 마을 신돌석 장군 생가

낮은 구릉으로 감싸인 땅이다. 환한 남쪽에는 실개천 따라 고샅길 흐르고 그 너머로 논이 펼쳐져 있다. 집은 초가, 남향한 네 칸 집이다. 원래 1850년 무렵 신돌석 장군의 아버지 신석주(申錫柱)가 이 땅에 집을 지었고 이후 불탄 것을 1995년에 복원했다. 이곳에서 신돌석은 1878년 11월3일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호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다. ‘돌석’은 그의 아명이었다.

신돌석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그의 집안은 벼슬길이 막혔고, 7대조 때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았다고 한다. 한미한 평민 집안이었지만 신석주는 건실하게 가산을 모아 비교적 넉넉했다고 전한다. 10대의 돌석은 인근 마을에서 강학하던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육이당의 아들 이병국은 신돌석에 대한 부친의 인물평을 글로 남겼는데 ‘그의 마음이 명민하고 국량이 넓고 힘이 뛰어나니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인정하고 함께 공부하게’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신돌석은 행동이 날래고 담용이 뛰어나 항상 소년들의 대장이었다 한다.

신돌석 장군의 집은 일본군에 의해 최소한 두 번 불탔다. 첫 번째는 1906년 초 신돌석 장군의 의병군에 패한 일제가 ‘이곳이 신돌석의 집이다’며 불태웠다. 그때 신씨 집안의 집 수십 채가 함께 불탔다 한다. 두 번째는 1908년 4월 또다시 패한 일본군에 의해서다. 그들은 이미 불탄 빈터에 다시 불을 지르고 큰 이무기를 죽였다고 한다. 큰 이무기는 옛터를 지키고 있던 장군이었다고 전해진다. 1940년에도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는 정치적 의도로 일제가 불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불의 기미는 없다. 흙은 포슬포슬 맑고 집은 말쑥하다. 차라리 그 말쑥한 모습과 훈기 없는 허허로움이 전소(全燒)를 상기시킨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신돌석 장군이 의병에 처음 참여한 것은 19세였던 1896년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전국적으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장군의 ‘영해의진’ 중군장이 되어 남천숲 전투에 참여했다. 현재의 영덕대교 아래 오십천 변이다. 그러나 고종에 의해 의병은 해산되었고 이후 신돌석은 강원, 경상, 충청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했다. 장군은 훗날 대한광복회 대표가 되는 박상진 장군과 의형제로 지냈으며 손병희, 민긍호, 이강년 등과 교류했다 한다.

장군은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다시 기병한다. 장군은 복디미 마을의 주막 앞에서 동지 300여 명을 모아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일으켰다. 의진에는 농민, 포수, 천민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40~50대의 유생도 여럿이었다. 1907년에 이르러 그의 군사는 3천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장군에 대한 민중의 신망은 절대적이었다.

‘영릉의진’은 영양의 분파소와 군청을 불태우고, 이강년과 함께 영주의 순흥을 공격하여 일제의 시설들을 모두 불태웠으며, 울진 장흥포에서는 일본군선 9척을 침몰시켰다. 1908년까지 수많은 토벌대의 추격을 따돌리며 영해, 영덕, 평해에서부터 삼척, 양양, 강릉, 원주, 안동, 영양 등 경북 북동부와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신출귀몰’하고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나돌았고, 사람들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1908년 많은 의병장이 순국하고 전세가 나빠지자 장군은 후일을 기약하며 의병을 해산했다. 당시 장군에게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는데 황금 1천근과 1만호 고을의 조세권 등 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의 금액이었다. 그해 겨울 그는 영덕 지품면 눌곡리에 있던 옛 부하이자 고종사촌인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한다. 현상금에 눈먼 김씨 형제는 장군에게 독주를 먹여 취하게 한 후 도끼로 살해했다. 30세. 너무 젊은, 너무 비참한 죽음이었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도곡리 마을 초입에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7번 국도에서 한눈에 보이는 장소다. 경내에는 장군의 사당과 기념관, ‘의병대장신공유허비’와 ‘순국의사신돌석장군기념비’ 등이 자리한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장군의 시 ‘우국(憂國)’을 새겨놓은 커다란 시비석이다.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 채/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시비 너머 단 높은 땅에 장군의 사당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태극이 그려진 두 개의 삼문 안쪽에서 사당은 고요하다. 안에는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정은 의자에 앉아 긴 칼을 쥔 모습이다. 신돌석 장군은 키가 170㎝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편이었으며, 넓은 턱에 큰 얼굴은 거무튀튀했고 천연두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단 낮춘 자리에는 기념관이 있다. 문이 열리며 가장 먼저 만나는 장군의 흉상에는 커다란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1909년 권성탁이라는 사람은 장군의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대 자식은 천하 고금에 다시 있기 어려운 의열과 굳세고 흔들리지 않는 절의를 지녔으니 어찌 말이 필요하겠느냐. 시대의 운수가 좋지 않아 참혹하게 죽었으나 후일 하늘에 해가 다시 밝아질 것이니 그대 자식 같은 자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일세.” 장군이 귀천한 직후 외아들도 사망했다. 부인은 화전을 일구며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냈으며 1952년 사망할 때까지 곤궁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정부가 신돌석 장군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한 것은 1962년, 광복 17년 만이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포항고속도로 포항 나들목으로 나가 영덕, 울진방향 7번 국도를 타고 북향한다. 영덕읍내에서 울진 방향으로 가다가 영해면 소재지에 닿기 전 축산면 도곡리 7번 국도 바로 오른쪽에 신돌석장군 유적지가 위치한다. 유적지에서 마을 안쪽으로 약 1.6㎞ 들어가면 도곡2리 마을회관 앞에 신돌석장군 생가가 자리한다. 안내도 잘 되어 있고 주차 공간도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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