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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1> 골짜기의 집 - 청송 현서면 추원당·지양정·월송정

2017-08-30

‘道 흐르는 골짝’추원당 마루에 서면 자연과 사람과 집은 구분되지 않는다

20170830
청송군 현서면 도리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운 당당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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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정은 의성김씨 30대조 김심(金深)이 살며 공부하던 정자다. 한때 서당으로 사용되다 기울어진 것을 후손들이 당원(堂員)을 모아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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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은 설학재공의 10세손으로 청송에 입향한 월정 정지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골짜기 곡(谷). ‘샘물이 솟아 나와 산간을 흐르는 물길’을 뜻한다. 또한 ‘깊은 굴’이나 모든 혈 자리들 가운데에서 기본이 되는 ‘경혈(經穴)’을 뜻하기도 하며 크게는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리 주어진 운명이든, 어느 날 맞닥뜨린 운명에 의해서든, 골짜기에 스스로 자기의 방을 둔 사람들은 그 골짜기와 하나로 보인다. 그들은 운명이나 질서 안에서 자유롭고, 운명보다 강한 삶을 산다.

중종반정 공신 道谷 김한경이 낙향해
독서·강론으로 97세의 생을 마감한 곳
후손들 추원당 지어 그의 높은 뜻 기려

큰 은행나무가 마을입구 지키는 원도동
의성김씨 30대조인 김심 은거한 지양정
산수에만 즐거움을 두고 93세까지 살아

길고 좁은 길의 끝에 고요한 생초전 마을
초입 길가 소나무같이 들어앉은 월송정
태조와 친분 설학재 10세손 정지웅 추모


#1. 도리 재동의 추원당

‘의성김씨세거지(義城金氏世居地)’ ‘추원당(追遠堂) 입구’라 각자된 거대한 표지석이 도롯가에 서 있다. 흔들리지 않는 선두의 깃발 같아서, 저절로 뒤따라야 할 것 같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러나 의심 없이.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골짜기를 거슬러 가다 보면 갈림길에 서게 된다. 재동길과 도리길이다. ‘추원’이란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뜻이니 재사가 있을 법한 재동으로 간다. 곧 마을이다.

청송군 현서면 도리는 500여 년 전 의성김씨 도곡(道谷) 김한경(金漢卿)이 낙향해 처음 정착하면서 그의 호를 따 도동(道洞)이라 했다. 도곡의 사후 후손과 제자들이 재사(齋舍)를 지어 마을 이름을 재궁(齋宮)이라 하였고 재궁곡, 재궁골 등으로 불리다 재동이 되었다. 도곡은 연산군시대의 인물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과 뜻을 같이해 중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한 반정공신이었다. 중종 원년인 1506년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훈록(勳錄)되고 정2품 자헌대부 지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후 공신들이 파를 지어 싸우는 것에 염증을 느껴 도리로 낙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독서와 강론을 하며 평생을 조용히 지내다가 1552년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금 재사인 추원당의 서편 산중턱에 묘소가 있다.

마을에서 재사는 보이지 않는다. 뒷산 쪽으로 또렷하게 굽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면 나무그늘 속에 선 신도비를 지나 양지바른 땅에 유현하게 자리한 추원당이 보인다. 곁에는 장서각과 화장실이 갖춰져 있다. ‘운흥문(雲興門)’ 편액이 걸린 육중한 문을 힘주어 열면 단정한 사각의 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 추원당이 마주하고 좌우로 부속건물이 있어 전체가 단단한 ‘ㅁ’자를 이루고 있다. 추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 주초 위에 원주를 세운 당당한 건물이다. 넓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2칸의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어칸을 제외한 4칸 전면에 헌함을 둘렀다. 왼쪽 측면에는 창살 모양이 다른 2개의 벼락닫이창이 있고 오른쪽 측면에는 벼락닫이창 하나와 1칸 벽장이 달려있다. 대청의 뒷벽 오른쪽 1칸에는 골판문을 달고 아주 좁은 쪽마루를 설치했고 가운데와 왼쪽 문에는 바람을 막는 풍서란형 설주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대청에서 보면 오른쪽 방문 위에 사성재(思成齋)와 회재당(會齋堂) 편액이 걸려 있다. ‘사성’은 생각하며 제사 지내고 조상의 모습을 대하듯이 정성을 쏟는 것을 말한다. ‘회재’는 모여 재계한다는 뜻으로 1727년에 후손 김채중(金彩重)이 썼다고 전해진다. 왼쪽 방문 위에는 학습재(學習齋)와 도곡정(道谷亭) 편액이 걸려 있다. ‘학습’은 배우고 제때에 익힌다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뜻을 지니고 ‘도곡정’은 공이 도리에 은거하여 지은 집의 이름으로 1765년에 쓰여진 편액이다.

추원당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처음의 자취는 종갓집의 화재로 모두 사라졌다. 현재는 1941년, 1979년, 2007년의 중수기가 있다. 1941년의 중수기에 ‘공이 돌아가신 후 묘 아래 이 당을 세우고 묘제를 지냈다’는 내용과 ‘19세기 초중반에 추원당의 북쪽 언덕에 사당을 세우고 ‘도동사(道洞祠)’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1908년에는 ‘기울어진 용마루를 바꾸고 삼나무 서까래로 바꾸었으며, 깨어진 기와를 붙여 다시 덮고 버팀목을 제거하여 바로잡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도곡정의 기와를 모두 들어내어 추원당을 덮었다, 칠을 했다, 모서리 문을 고쳤다 등등의 이야기들이 길게 전해진다. 추원당은 긴 시간 동안 그때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왔다. 이는 동시에 긴 시간 동안 후손들의 손길이 끊임없이 닿아왔다는 의미다.

어칸 앞에 서면 대문채 너머 은행나무와 재동 남쪽을 흐르는 산줄기가 보인다. 평화롭다. 도(道)란 길이고 근원이고 이치며 나아가 도덕과 인의(仁義)를 뜻하니 ‘도’와 ‘곡’은 한길로 통한다. 이곳에서 골짜기와 마을과 사람과 집은 구분되지 않는다. 운명이 낳은 재앙을 모조리 삼켜버릴 수 있는 힘은 재앙을 지극한 복으로 바꾸는 힘 또한 가진다.



#2. 도리 원도동의 지양정

재동의 북서쪽 골짜기에 자리한 원도동(元道洞)은 도리의 뿌리가 되는 마을이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을 입구를 지키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은행나무 옆에 곧고 좁은 길이 지붕을 인 한 칸 대문까지 인도하듯 뻗어 있다. 길 양쪽으로 밭과 농기계와 비닐하우스가 어지럽다. 뒤쪽은 낮은 산이다. 그러한 속에 마치 쇠로 주조한 듯이 여물게 보이는 팔작지붕이 또렷한데, 의성김씨 30대조 김심(金深)이 살며 공부하던 지양정(芝陽亭)이다. 김심은 이곳에 두어 칸의 정자를 짓고 숨어 살면서 바깥세상을 생각지 않았고 명성을 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수에 즐거움을 두고 93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그의 은일하고 소박한 거처는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고 터는 황폐해졌다. 후손들은 힘을 모아 서당을 겸한 재사로 다시 세우면서 처음에는 도동서당으로 지어 도동정(道洞亭)이라 현판을 걸었다. 동서쪽에는 각각 강의헌(講誼軒), 모선재(慕先齋) 현판을 걸었는데, 처음부터 ‘지양’으로 이름하지 않은 것은 공과 사를 구별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이후 다시 기울어진 것을 후손들이 당원(堂員)을 모아 중건하면서 편액을 ‘지양’으로 걸었다.

문은 지게막대기 여럿을 괴어 의지적으로 막아놓아 가벼이 손대기 어렵다. 발돋움 해 담장 너머를 들여다본다. 지양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가운데 대청을 열고 양쪽에 방을 둔 모습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깔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정면의 4개 기둥만 원주를 썼는데 고색이 짙으나 탄탄하게 서있다. 어떤 연유에선지 지양정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지양’이란 무슨 뜻일까. 양지에 가득 자라나는 풀일까. 송나라 성리학자 주돈이(周敦 )는 ‘뜰에 자라나는 풀들을 뽑지 않고 지켜보면서 천지 기운이 생동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지금 현판 없는 작은 집은 흐르는 세월을 그저 내버려두고 마당 가득 자라난 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3. 두현리 생초전 마을의 월송정

남북으로 긴 골이다. 작은 천이 골 따라 흘러 길안천과 만나는 곳에 골짜기의 입구가 있다. 옛날에는 골의 입구가 나무로 막혀 잘 드러나지 않았고, 세상에서 좋은 곳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한다. 찾는 이 드물었던 이곳을 한 도승이 지나면서 ‘초록 풀밭’이라 한 것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청송군 두현리 생초전(生草田)이다. 지금도 고요함은 물 속 같지만 생초전교로 이어지는 입구는 활짝 열려 양쪽으로 사과밭이 융융하다. 다리 근처에 화강석 비석 하나가 서 있는데 대략 ‘동래정씨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후손들이 생초전에 입향했다’는 내용이다.

설학재는 조선 초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칩거하면서 두문동(杜門洞) 현인들과 마음으로 동행했지만, 이후 태조·태종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출사한 인물이다.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의 제액(題額)을 공이 썼다고 하니 그 친분을 짐작할 만하다. 설학재의 10세손 정지웅(鄭之雄)이 선조 초 성주에서 청송 월정(月亭)으로 입향해 마을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고, 그의 아들 세련(世璉)이 월정에서 생초전으로 이거해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한다.

정말 마을이 있을까 싶은 길고 좁은 길 끝에 드디어 마을이 나타난다. 그 초입 길가에 후손들이 월정 정지웅을 기려 세운 월송정(月松亭)이 공들여 쌓은 정연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이 있고 양쪽은 방이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마루 아래에는 화강석 기둥을, 위에는 둥근 나무기둥을 세웠다. 익공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보머리는 날카로운 눈매의 봉황으로 장식되어 있다.

우물 같은 땅이다. 눈앞에는 사과밭과 산줄기의 두 수평선이 나란하고 하늘은 궁륭처럼 시야를 덮고 있다. 눈 시릴 만큼 환한 것이 가슴 먹먹할 정도로 고적하다. 월송정기(記)에 선생(월정 정지웅)은 왜란과 호란, 남한산성의 치욕과 이후의 어지러운 세상에 대해 ‘반드시 창과 방패를 닦아 원수를 칠 뜻을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눈물만 떨구었다’고 한다. 이 외에 월정 정지웅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정자의 이름이 왜 월송정인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후인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 소나무와 같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골은 깊고, 사모의 마음은 높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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