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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6> ‘그리움과 탄식 사이…’ 청송 안덕면의 망운정·남포정·지악정·방호정

2017-10-25

충효·학문, 가문의 업으로 삼아…고향 어버이 그리며 살던 곳

20171025
청송군 안덕면 명당리에는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 조지가 지은 망운정이 자리하고 있다. ‘망운’이라는 편액은 당나라 적인걸의 고사 망운지정에서 따온 것으로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작은 사진은 남포정으로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검소한 건물이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 중수했다.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인 망운(望雲) 조지(趙址)가 조부 조연(趙淵)의 명으로 함안에서 청송 안덕으로 이주한 때는 1562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다. 그가 정착한 곳은 길안천과 보현천이 동북서쪽을 감싸 흐르는 구릉진 땅으로 보현산의 지맥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명당이었다. 그 땅에서 조지는 8남매를 얻었고 평생 근검과 군자의 몸가짐을 가르치며 충효와 학문을 가문의 업으로 삼을 것을 강조했다. 세 딸은 신지제(申之悌), 장후완(蔣後琬), 이종가(李從可)에게 출가하였고, 수도(守道), 형도(亨道), 순도(順道), 준도(遵道), 동도(東道) 다섯 아들은 세상이 칭송하는 인물로 자랐으니 새로운 땅에서 훌륭히 일가를 이루었다 할 만하다.

#1. 망운정과 남포정

땅의 형세는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어 명당리(明堂里)다. 현재 명당리는 청송 안덕면의 구심점으로 성장해 있다. 조지는 마을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그 남쪽에 정자를 지어 ‘망운(望雲)’이라 편액했다. 그것은 당나라 적인걸의 고사 ‘망운지정(望雲之情)’에서 따온 것으로 ‘타향에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조부 조연이 손자 조지에게 안덕으로의 이주를 명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의금부 경력(經歷)을 지낸 조연은 김안로(金安老)의 세도를 염오해 벼슬을 버리고 청송 안덕으로 이거한 적이 있는데, 혹 그때의 풍정이 심중에 남아 귀애하는 손자를 보낸 것은 아닐까 싶다. 고향과의 거리 300리, 망운이란 단순한 그리움이라기보다 곁에서 효를 다하지 못함에 대한 탄식일 게다. 하여 그는 매년 3월마다 고향으로 달려가 효제(孝悌)의 도를 다하였다 한다.


길안천·보현천이 흐르는 구릉진 땅
생육신 어계 조려의 현손 망운 조지
고향 떠나 일가 이뤄 살던곳 망운정
8남매중 셋째 조순도의 정자 남포정
평생 홀로 부모곁 지키며 孝 다한 곳

넷째아들 조준도 어머니 세상 떠난후
묘소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방호정
다섯째 조동도 지악정 지어 묘소 지켜



빽빽하게 채워진 마을 가운데에 기와돌담으로 둘러진 너른 경역이 고요히 펼쳐져 있다. 그 속에 솟을대문으로 구획된 망운정(望雲亭)과 협문으로 구회된 남포정(南浦亭) 두 채의 정자가 자리한다. 조지의 큰아들인 수도는 스물여덟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도는 어릴 때 큰아버지인 만호(萬戶) 조우(趙 )의 양자가 되었고 장성해서는 임진왜란에 출정했다. 넷째 준도는 재종숙부인 사직공 조개에게 출계했으며 노친을 봉양한 이후 정묘호란 때 창의하였다. 다섯째 동도는 열다섯 나이에 형 형도와 함께 전장에 나아갔다. 남포정은 셋째인 조순도의 정자다. 그는 평생 홀로 부모의 곁을 지키며 효로써 충을 행하는 삶을 살았다.

망운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두 칸 대청이 있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마당에는 수려한 한 그루 회나무가 서있고 그 아래에는 옥정이라는 작은 우물이 있다. 그 뒤로 조지의 유허비와 맏아들 조수도의 유적비가 나란하다. 망운정 대문 앞에는 연못이 있다.

둘째 조형도는 아버지의 집에 대한 시 ‘망운정잡영(望雲亭雜詠)’을 남겼다. 그 첫째가 ‘소지(小池)’로 ‘반이랑 되는 모난 연못에 활수가 돌아드니/ 밝은 달 고요한 물결이 거울로 온전히 펼쳐진 듯’하다고 했다. 담담한 어조 속을 헤집어보고 싶은 취향은 애써 두덮고, 여전히 집 앞에 자리한 연못에서 대를 이은 세심한 존경을 읽는다.

남포정은 정면 3칸 측면 반 칸 규모의 지극히 검소한 건물로 망운정을 바라보며 서있다. 노쇠했으나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지쳤으나 온화함을 잃지 않은 사람 같다. 1950년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65년에 중수했다. 경내에는 조순도의 유허비가 다소 쓸쓸하게 서있다. 후손들이 보기에도 그러하였는지 두 정자 사이에 또 하나의 조순도 신도비각이 위치한다. 2006년에 상량한 것이다. 조순도는 비록 후방에 있었지만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전장으로 격려의 글을 보내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전략을 세워 ‘자리에 앉은 지휘관(座元帥)’이라 불렸다 한다. 만년에 그는 후학을 가르치다 1653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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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방호정은 망운 조지의 넷째아들 조준도가 지은 정자다. 조준도는 어머니 권씨의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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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악정은 망운 조지의 다섯째아들 조동도가 지은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한 것인데 망운정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2. 지악정과 방호정, 그리고 금대정사 

 

망운 조지는 1599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할아버지 조연의 사당 근처에 있다고 하는데 사당은 안덕면 덕성리에 있었던 덕봉사(德奉祠)로 여겨진다. 덕봉사는 조려, 조연, 조형도를 배향하고 후학양성의 지소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망운 조지는 1736년에 건립된 금대정사(金臺精舍)에 큰아들 수도와 막내아들 동도 등과 함께 모셔져 있다. 금대정사는 망운정의 동북쪽 신성리 계곡의 초입인 속골에 위치한다.

신성리 금대는 1619년경 사망한 망운 조지의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넷째 조준도는 친어머니 권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방호정(方壺亭)이다. 다섯째 조동도는 1624년 금대 아래에 정자를 지었다. 지악정(芝嶽亭)이다. 두 아들이 어머니의 묘소를 지킨 셈이다.

방호정은 1억 년 전에 만들어진 벼랑 위에 올라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 다리는 조준도의 후손인 조학래가 현대에 만든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절벽 쪽의 전면은 팔작지붕이고 측면은 맞배지붕이다. 전면에는 마루방 두 칸과 온돌방 한 칸, 측면은 부엌과 한 칸 온돌방이 있다.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마루방에는 하부에 2단으로 궁창널을 끼운 세살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방호 조준도는 정자를 짓고 ‘풍수당(風樹堂)’ 또는 ‘사친당(思親堂)’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라고 노래했다. 지금 정자에서 어머니 안동권씨의 묘소는 보이지 않는다. ‘방호’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산 또는 섬 중의 하나다. 방호정은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집중된 고독으로 앉아 있다. 그것은 때때로 비회를 느끼게 한다. 보이지 않는 심해에서 육지에 닿아 있는 섬처럼.

지악정은 금대정사의 왼쪽에 자리한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아주 소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1962년에 확장 중수한 것인데 망운정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형 조형도와 종군하였고 정유재란 때 향의장(鄕義將)으로 활약했던 조동도는 ‘도를 닦을 때는 경망(景望:조동도의 자)에게 의지하라’는 글을 얻었을 만큼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았다. 전쟁 후에는 포상을 거절하고 형들과 함께 자연에 묻혀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다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가 묻힌 금대 안산에 묻혔다.

금대정사는 다섯 형제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건립되었다. 재사는 산을 등진 높은 대 위에 동남향으로 올라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집으로 중앙 2칸은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고, 좌우는 각각 통간 온돌방으로 ‘금대(金臺)’와 ‘사암(思庵)’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앞쪽 낮은 마당에는 동 서재와 대문채가 튼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다. 1847년에는 재사 오른쪽에 조지와 조동도 부자를 위한 묘우, 강당, 문루 및 동 서재 등을 건립했다. 그러나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대부분 훼철되었고 묘우만 남은 것을 고쳐 우모정(寓慕亭)이라 했다. 우모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수리를 한 모습이다.

네 형제만이 살아있을 무렵, 그들은 가끔 망운정에 모였다. 초대되었던 하음(河陰) 신집(申楫)이 형제의 말을 글로 전한다. ‘지나간 일과 흘러간 구름은 부모를 사모하는 망극지통의 눈물이요, 흘러간 세월에 모두가 묵은 자취가 되었으니 우리 사형제 비록 선군의 남기신 자취를 밟아 보고져 이곳에서 시를 읊고, 이곳에서 활을 쏘고, 이곳에서 음주를 한들 다시 무엇을 첨망하리오.’

그 모습이 매우 슬퍼 신집은 ‘전일에 망운한 분이 효자라면 오늘 망운하시던 분을 생각하는 사람도 효자로다. 이후 후손들도 이어 이어 효도하지 아니하랴’고 위로했다 한다. 지금 망운정 담벼락에는 1999년 8월10일 중수되었다는 표석이 붙어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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