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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2020-12-11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경기도 광주가 본관인 광주이씨는 조선 초 대표적인 훈구파 집안으로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서 당대 최고의 벌족으로 꼽았다. 성종 때 극자 돌림 사촌 8명이 당상관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해 '8극'으로 불린다. 하지만 갑자사화 때 멸문의 화를 당한다.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형방승지가 일족임에 발단돼 40여 명이 연루되자 전국으로 피신했다. 그중 한 곳인 칠곡 왜관읍 매원마을 전경.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조선 후기 영남 남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광주이씨 이원정의 영의정 증직과 문익공 시호 교지.


경상도는 따뜻하고 살기가 좋아 옛날부터 수도에 사는 선비들은 경상도 집안으로 장가 들어 처가고을에 세거했다. 조선 초 정난(靖難)이나 사화에 연루돼 가문에 위기가 닥치자 경상도로 피신했다.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낙남(落南)'이라고 했다. 네 번의 사화에 많은 집안이 낙남했지만 그중에서 칠곡의 광주이씨, 영양의 한양조씨, 안동의 고성이씨가 대표적 명문가로 뿌리를 내렸다. 광주이씨는 출사(出仕)로, 한양조씨는 대의와 지조로, 고성이씨 집안은 풍류와 독립운동으로 가문을 빛냈다.

의성·칠곡에 온 광주이씨
성종때 극자 돌림 사촌 8명
당상관으로 어전회의 참석
갑자사화때 연루되며 멸문
칠곡에 자리 잡은 집안은
처가 재산 물려받아 부흥
의성으로 온 이세좌의 현손
조선후기까지 재지사족으로

◆광주이씨 집안은 다시 출사해

경기도 광주가 본관인 광주이씨는 조선 초 대표적인 훈구파 집안으로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서 당대 최고의 벌족으로 꼽았다. 성종 때 극자 돌림 사촌 8명이 당상관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해 '8극'으로 불린다. 하지만 갑자사화 때 멸문의 화를 당한다.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형방승지가 일족임에 발단돼 40여 명이 연루되자 전국으로 피신했다.

경상도권 낙남지는 칠곡과 의성. 칠곡으로 낙남한 집안은 처가 재산을 물려받아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백년 만에 이윤우가 처음 출사한 뒤 4대가 내리 대과급제를 했다.

숙종의 환국정치 때 이조판서, 대사헌, 이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서인세력과 대항했다. 예송논쟁을 이끌었던 귀암 이원정이 대표인물이고 조선 후기 영남 남인으로 가장 고위직에 올랐지만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17세기 백년 동안 4대가 조정신료로 봉사하다가 갑술년(1694년) 축출로 중앙정치에서 사라진다.

낙향 후 낙동강 수운을 이용한 소금 판매와 소작인 영농방법을 개선으로 큰 재산을 축적해 '돌밭(石田)감사댁'으로 불렸다. 근래에 와서 이곳 출신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서울대 학생처장 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배 중이던 제자들을 칠곡 고향에 숨겨준 일화가 있고 이수인 교수가 동생이다. 6·25전쟁 때 낙동강전투로 피해를 입었지만 귀암종택 매원마을 묵헌종택 등으로 복원됐다.

의성으로 낙남한 집안은 8극 중 둘째집안 이조판서 이세좌의 현손(손자의 손자) 이산악이다. 그는 1573년 초시에 장원급제하고 사마방목(초시합격자 명부)에 수위로 이름을 올렸지만 대과의 벽을 넘지 못해 관리가 되지 못한다.

조부가 대학자 이연경의 막내 동생이고 종조부가 영의정 이준경, 종고모부가 영의정 노수신으로 대과급제해 출사했더라면 명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쉽다. 이백 년 뒤 정조 말엽에 일어난 영남만인소 사건에 문중 유생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재지사족으로 살아남은 것 같다.

영양에 터잡은 한양조씨
조광조 일족, 기묘사화 탓에
영주로 정착했다 영양으로
영남 남인 질곡의 상징 조덕린
영조 1년때 상소 정명론 올려
집권세력의 미움 받으며 유배
조지훈 '지조의 시인' 이름값
아버지代는 제헌의원 등 역임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영양으로 피신해 정착한 한양조씨 호은종택의 후손 중 훗날 청록파의 한 명이고 지조론의 주인공인 조지훈 시인.

◆한양조씨 집안은 대의와 지조로

수도가 본관인 한양조씨는 중종 때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어 가문에 먹구름이 다가오자 일족이 낙남해 영주에 정착한다. 임란 후 후손이 영양으로 넘어가 주실마을에 세거한다. 이곳 출신 옥천 조덕린은 영남사림 이현일 제자로 31세에 대과급제해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수차례 유배와 낙향으로 영남 남인의 질곡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1725년 영조 1년에 올린 '정명론(正明論) 상소'다. 당쟁의 폐해를 열거하고 공도를 넓혀 사사로움을 없애 이름과 실질을 바르게 해야 나라의 근본이 이뤄진다는 시무(時務)의 소로 승정원일기에 수록돼 있으며 새 임금 등극에 68세 늙은 신하는 죽음을 무릅썼다.

영조는 그의 대의와 정명에 공감을 나타내지만 집권세력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된다. 스승 이현일의 유배지에 30년 뒤 제자가 다시 귀양갔으며 유배길 나이도 스승과 같은 68세였다. 이후 당파 싸움에 명분을 들먹거릴 적마다 그의 정명론이 약방의 감초처럼 동원됐고 조선왕조실록에 200번 넘게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인좌난이 발생하자 71세 나이로 영남유림은 대의에 좇아 창의해야 한다고 호소했고 당상관 동부승지까지 오른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나이 80세 때 정명론 상소가 다시 불거져 제주도로 유배 가던 중 강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실마을 옥천종택의 주인이다.

지조의 시인 조지훈은 이곳 호은종택 자손이다. 아버지 4형제는 국립도서관장, 제헌의원, 초대 대구민선시장과 경북도지사, 시조시인을 했다. 산촌 벽지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물이 나왔는지. 주실마을에는 수구(水口)막이 비보(裨補)숲이 있다. 풍수지리상 좌청룡의 지세를 보(補)하려고 수백 년 전부터 문중숲으로 가꾸었고 2008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숲'으로 선정된다. 인간과 숲의 동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숲 덕분에 지금도 인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한다.

'살찐 돼지보다 깡마른 학이 되라'고 했던 조지훈은 27세에 고려대 교수가 된다. 그는 시 '봉황수'에서 망국의 슬픔을 지조로 승화시켰고 승무에서 민족의 정서를 춤사위에서 찾았다. 수많은 청춘이 그의 시를 암송하면서 옛것의 아름다움에 눈떴고 자부심을 키웠다. 나라 잃은 슬픔이 속된들 어떠랴. 한마음 지키며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선비품격으로 역사 아픔마저 지조로 감쌌다.

그의 왼손 등에 화상 자국이 있다. 서울 수복 얼마 후 천주교 신부들과 문인들이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하면서 지식인의 의지를 폄훼했다. 그러자 조지훈은 사육신을 예로 들면서 이 자리에서 보여주겠노라고 성냥개비 대여섯 개에 불을 붙여 자기 손등에 올려놓았다. 성냥알 불꽃이 튀면서 손등이 지글지글 타들어 갔고 주위가 숙연해지자 조지훈은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다른 손으로 술잔을 들어 마시고 타다남은 성냥재를 입으로 훅 불어 날려버리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동서 재기한 고성이씨
계유정란의 불똥 튀어 낙남
법흥동 99칸 대저택 임청각
형조좌랑 지낸 이명이 지어
벼슬길보단 풍류를 가풍 삼고
11대 주인인 이종악 때 절정
독립군 양성 뜻 모은 이상룡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지내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고성이씨는 대대로 서울에서 살다가 세종조 좌의정 이원이 집안을 일으켰고 아들 이증이 계유정란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낙남한 이굉은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귀래정을 짓고,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은 법흥동 강언덕에 99칸 대저택 임청각을 지었다.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되는 이상룡도 그 집 출신이다.

◆고성이씨 집안은 풍류와 독립운동으로

고성이씨는 대대로 서울에서 살다가 세종조 좌의정 이원이 집안을 일으켰고 아들 이증이 계유정란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증의 아들과 손자가 김종직 제자로 사화에 연루돼 한 명은 참형 당하고 네 명은 귀양갔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낙남한 이굉은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귀래정을 짓고,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은 법흥동 강언덕에 99칸 대저택 임청각을 지었다. 이굉의 현손 며느리가 한글편지로 유명한 원이엄마이고 이명의 손녀가 일직 소호헌에서 약봉 서성을 낳아 대구서씨 약봉가가 시작됐다.

벼슬길보다 풍류와 처사의 삶에 자족했던 가풍은 집안 당호에서 시작됐다. 귀래정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원명를 차용했고 임청각은 귀거래사 구절 '동쪽 언덕에 올라 시를 읊조리고 맑은 물에 이르러(臨淸) 시를 지으리라'에서 따왔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고성이씨는 대대로 서울에서 살다가 세종조 좌의정 이원이 집안을 일으켰고 아들 이증이 계유정란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왔다. 낙남한 이굉은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귀래정을 짓고,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은 법흥동 강언덕에 99칸 대저택 임청각을 지었다. 훗날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 되는 이상룡도 그 집 출신이다.

고성이씨 풍류는 임청각 11대 주인 이종악 때 절정을 이루었다. 이종악은 젊은 시절 외증조부 조덕린과 내앞 외아재 김성탁의 유배길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임금이 세자를 굶겨 죽이는 세태에 염증을 느껴 과거공부를 접고 다 섯가지 멋을 아는 풍류가객으로 일생을 보냈다. 고서(古書)·탄금(彈琴)·화훼(花卉)·서화(書畵)·주유(舟遊)다. 지금은 중앙선 철길 때문에 낙동강 접근이 어렵지만 옛날에는 임청각과 귀래정 앞에 문중 나루가 있었다.

그의 아호 '허주(虛舟)'는 빈배다. 1776년 4월에 18명의 벗들과 함께 배를 타고 4박5일 동안 반변천을 거슬러 오르면서 탄금도 하고 선대가 만든 누정에 올라 춘경을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유람한 기록이 '사수선유록'이다. 낙동강 연안의 열두 경승지 실경을 그린 12폭 산수화첩이 '허주부군산수유첩'이다. 그의 진경산수화 '동호해람'에 임청각의 옛 모습이 담겨 있어 일제가 훼손한 임청각을 2025년까지 복원하는데 고증자료가 되었고 전서와 예서에도 뛰어난 경지에 오른 그는 진정한 풍류선비였다.

다시 백년이 흘러 석주 이상룡이 임청각 주인이 되었다. 석주는 공맹 공부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해도 늦지 않다며 나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하고 신민회 양기탁을 만나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과 양성에 뜻을 같이한다.

1911년 1월5일 마지막 제사를 지낸 뒤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가산을 정리해 친척과 가솔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 유하현으로 망명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삭풍부는 압록강을 건너면서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는 절명시를 남긴다.

일년 뒤 독립군자금이 모자라 석주는 장남 이준형을 고향으로 보내 임청각을 팔려고 했는데 문중에서 반대하며 그때 돈 500원을 마련해 주었다고 손자며느리 허은이 구술 회고록에서 밝힌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고 50여 년을 일관되게 구국의 삶을 살았다. 사백 년 내려오던 종가 임청각 대문을 폐쇄하고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시 '조국을 떠나며' 후반부이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낙남 명문가…禍 피해 영남으로 내려온 세 집안, 역경 딛고 명문가로 뿌리 내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강산이 왜놈 손아귀에 조여지고 있는데 어찌 대장부가 제 한 몸을 아끼랴. 잘 있어라 고향 산천아 슬퍼하지 말거라. 훗날 좋은 세상이 오면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고 했던 임청각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932년 75세 나이로 만주 길림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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