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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2021-08-1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인생은 결국 끝없는 전진이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있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석용진 작 '행보(行步)'
10대 때 처음 붓을 만난다. 집안의 한 어른이 내겐 자극제가 되었다. 이후 1981년 영남대 미술대 회화과를 졸업하기 전 서예반 한묵연(翰墨緣) 시절에도 나의 붓·먹·종이는 접점이 없었다. 항상 따로 놀았다. 점은 획으로, 획은 글자로, 글자는 문장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모든 게 다 분절돼 있었다. 마치 신경망도 혈관도 근육도 망가진 몸과 같았다. 그게 회통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취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다 구사했다. 붓을 발가락에 끼워 보기도 하고 모필장이 만든 붓이 맘에 들지 않아 털을 맘에 드는 부피로 만들기 위해 가위로 잘라 보기도 했다. 서예 속에 서예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외유(술)를 많이 했다. 2003년부터는 자연석과의 밀애, 1984년부터 20년간은 난초와 씨름을 했고 1977년부터 지금까지는 전각 삼매경을 더듬는다. 드릴, 정, 톱 등 별별 연장이 쌓여만 갔다. 온갖 나뭇가지와 여러 종류의 낙엽 등도 붓의 대용이 되었다. 하지만 서예의 본령은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내 부족함이 만든 고정관념이었다. 모양(형상) 너머를 나는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필력(筆力)·필세(筆勢)·필의(筆意)의 상호관계도 알 도리가 없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석용진 서예가가 자신의 작업실 문에 부착해 놓은 당호 '일사단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서법

여러 종류의 굵기를 가진 붓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철옹성'이다. 붓은 연필·볼펜이 아니다. 맘대로 갖고 놀려면 혹독한 연마를 해야 된다. 입문하면 곧바로 종일 기마자세를 취해야 되는 소림사 승려의 기본기처럼. 서예 입문자면 누구나 습득해야 하는 그 유명한 '영(永)자 필법'. 하지만 균형 맞추기가 죽을 맛이다. 이게 맞으면 저게 안 맞고. 위가 맞으면 아래가 무너진다. 사방은 맞는데 중앙은 허전하다. 그렇다고 길이를 같게 균분시키면 컴퓨터 글꼴로 죽어버린다. 붓을 누르는 힘과 필속(筆速)에 따라 글 모양은 천변만화다. 낱낱의 글자는 결구적으로는 멋진데 그게 다 모인 전체의 장법(章法)은 형편없는 하품(下品)으로 추락한다. 이와 반대로 낱낱은 볼품없어 보이는데 전체는 천품(天品)으로 우뚝하기도 한다.


서예는 균형과 절제
보름달 보다는 그믐달의 깊은 기운
공식처럼 되지 않아 닮기 어렵지만
나중에는 벗어나기도 어려운 경지



서예는 공식으로 풀리지는 않는다. 기본기란 것도 서예의 본령으로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한 건 아니다. 그래서 기술적인 글과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글씨는 품격이 달라지게 될 수밖에. 예술적 붓글씨를 쓰려면? 300여 명에 육박하는 고래의 명필 법첩을 품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사군자와 문인화, 게다가 자기 낙관을 전각 해야만 하고 한시와 한학에도 능해야 된다. 그래야 진정한 서예가랄 수 있다. 하지만 달라진 세상, 과연 그게 가능한 서예가가 몇이나 될까.

지금 팔공산 자락에 기거하는 남석 이성조는 내 사부다. 그로부터 1984년 아호인 일사(一思·一史)를 받았다. 2000년 무렵 고인이 된 석도륜 선생이 일사(逸史)를 권했다. 보통 석일사(石逸史), 지난해 중반부터는 성과 호를 합친 '석사(石史)'를 사용하고 있다. 서예를 한 이상 난공불락의 추사 한테 갇히지 말고 그를 자유롭고 뛰어 넘어서야 한다고 다짐했다. 추사정신이란 무엇인가, 기존의 서예를 그 너머의 서예로 옮겨놓는 것이 아닌가. 저승의 추사도 훗날 한국 서단이 너무 자신을 존숭하고 있는 게 심히 불편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기에 당연히 나는 그가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 추사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다. 그래야 한국 서예가 명실상부해지는 것이다. 나는 그 각오로 내 아호에 박힌 그 사(史)를 화두처럼 품고 진군 중이다.

◆대한민국 서예 대상

1989년 제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강희맹 시인의 시를 목간체 기운이 감도는 예서체로 쓴 작품이다. 1991년 4월25일 동아쇼핑 갤러리에서 생애 첫 전시회를 할 때 나는 그 작품을 걸지 않았다. 서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이전의 작품은 다 버리고 싶었다. 전통서예와의 결별이었다. 전시장에 건 작품은 글씨도 그림도 아니었다. 글씨가 궁극을 만나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궁극에 달하면 글씨로 변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서화는 동근(同根)이다. 하지만 나는 궁극에 달한 글씨의 세계에 더 방점을 찍었다. 광복 이후 1세대 서양화가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이응노, 남관 등이 문자추상의 신지평을 열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건 여전히 그림이지 글씨는 아니라고 믿었다. 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부터 현대 서예를 염두에 둔 게 아니다. 서예의 본질을 파다가 만난 것일 뿐이다. 내 작품은 기존 서예의 확장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전통과의 결별
추사 흠모하기에 '극복의 대상'
기존의 서예 그 너머를 꿈꿔와
제1회 서예대전 대상 수상한 후
궁극에 달한 글씨의 세계 천착



1960년대 일본에서 전위적인 서예운동을 전개한 이노우에 유이치 등을 견제하며 산정 서세옥, 원곡 김기승 등이 새로운 서예를 시작했지만 명실상부한 서예 현대화는 얼마 전 작고한 도곡 김태정으로부터 본격화한 게 아닌가 싶다. 1990년 한국 현대조형서예협회가 생겨나고 물파 운동도 이어지지만 결국 지지부진해지고 말았다. 내가 첫 개인전을 했을 때 지역 서예계 어른들은 '전통서예를 망치는 놈'이라고 노발대발하셨다. 난 지역 서예계의 이단아, 불한당으로 폄훼된다. 하지만 서양화 진영에선 신선한 충격이란 반응을 보여주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모호한 약속' 시리즈에 등장하는 떨어진 대나무 잎 같은 나의 수(水)·불(佛)·중(中)의 작품 필획은 우연의 일치랄까 추사가 71세로 돌아가기 며칠 전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에 남긴 '판전(板殿)'의 졸박(拙樸)한 획을 닮고 있었다.

내가 서예에 본격적으로 입문했을 때 남석 선생으로부터 '수졸회적(守拙晦跡)'이란 말을 전해 들었다. 그 말은 남석의 스승인 청남 오제봉한테서 발원된 것이다. 붓글씨를 하되 너무 반듯하지 말고 조금 졸박하고 보름달빛보다는 그믐달의 유현(幽玄)한 기분을 작품에 깃들게 해야 된다는 주문이었다. 이는 노자의 경지를 암시하는 대교약졸(大巧若拙·매우 공교한 솜씨는 서투른 것같이 보인다는 뜻), 난득호도(難得糊塗·멍청하게 보이는 명석함을 얻기 힘들다)의 경지와 흡사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청고고아(淸高古雅)의 경지고 결국 논어에 등장하는 '사야(史野)'에 이르게 된다. 사야는 올곧은 군자의 모습을 의미하며 서예로는 정법을 품은 신법의 경지를 암시한다. 서예 5체(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정법이란? 입문하는 길은 있는데 거기서 졸업하기란 실로 불가능하다. 그게 바로 '수파리(守破離)'다. '처음에는 닮기가 어렵고 나중에는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석용진 작 '중(中)'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부식 동판에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말을 새겨놓은 작품.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석용진 작 '수(水)'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수정에 붓글씨를 올려놓은 작품.
◆일사의 쓴소리

글씨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은 모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호흡을 끊고 필획에 정신을 집중하면 절로 필획이 자신을 이끄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당부한다. 생명의 근원인 획이 살아나지 않고는 어떠한 아름다운 조립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서예가 아니라 문자 디자인일 뿐이다.

현재의 서예는 오랜 역사의 전통과 많은 수의 서예 인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낙후되고 침체되어 일반 미술애호가와 화랑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와는 다른 가옥구조와 벽면처리는 기존의 서예작품이 가진 규격이나 액자, 족자 양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공간에 어울릴 수가 없게 되었다. 컬러TV의 보급 이후 혁신적으로 변한 현대인의 색조 감각과 디자인 선택의 안목에는 서예인들이 주장하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특히 매년 열리는 100개가 넘는 공모전의 동일한 규격과 비슷한 작품체제는 서예 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이다.


서예의 현실
소수 전문가 주도 비슷한 공모전
현대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규격
미술애호가·화랑이 외면하게 돼
영광을 다른 장르에 빼앗겼지만
미학이 궁극에 달하면 회귀할 것
나는 그시대를 대비하는 '서태공'



서예 현실은 소수 전문가에 의해 주도되고 대다수는 공모전을 위주로 하는 취미생들로 이루어졌다. 소수의 전문가 서예가조차 서숙이나 서예학원의 경영, 공모전 지도로 인한 시간 낭비, 잦은 행사, 예술가로서의 전문의식 미흡으로 인해 '판박이 서예'로 추락 중이다. 따라서 미래의 서예는 전문성을 갖춘 신세대 서예가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서예가 석용진 2…서예 망치는 놈 소리들었지만…추사를 뛰어넘으려 나는 오늘도 전진한다
서예와 상업디자인이 캘리그래피란 형식으로 묶이고 있다. 영화, 광고, 상품디자인의 표제, 북디자인과의 결합 등으로 변용된다. 구태의연한 전통액자 양식이나 족자 형식으로는 나날이 눈높이를 더해가는 현대인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서예는 '리어왕' 같다. 모든 영광을 다른 예술 장르에 뺏기고 광야를 헤매는 것 같다. 하지만 호락호락한 서예가 아니다. 결국 모든 예술적 미학이 궁극에 달하면 다시 서예로 회귀할 것이다. 나는 그 시대를 미리 맞기 위해 변방의 달빛을 미끼로 낚시를 하고 있다. 강태공이 아니라 '서태공'이랄까!

일사 50회 개인전. 8월20일~9월25일 달성군 가창면 '아트 도서관'(가창면 우록길 131).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 일사 석용진
1958년 대구 출생
1981년 영남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9년 제1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2005년 제1회 서울서예비엔날레 특별상
작품집 '석용진' '석일사 전각선' '問道' '心銘' '夢緣' '한 생각 만 갈래'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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