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에서 '구도', 또 누군 '허무'와 '관조'를 읽고 갔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주장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 안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그 어떤 아득한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그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자격조차 내게 있을까 싶다. 나는 유교에서 멀어지기 위해 불교로 틈입하려 했다가 결국에는 기독교에 귀의했다. 내 젊음은 종교의 경계를 걷는 나날이었다. |
그는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6년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명덕국민학교, 대구중, 대건고를 나왔다. 시장 경기는 잘 굴러갔지만 청년들의 '영혼 경기'는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가장 퇴폐적이고 저항적이고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흐름이 동시다발적으로 대학가를 관통한다. 정의를 가장한 회색인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설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의 깊은 내면의 광야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극단적 우울과 염세, 그리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 유일한 돌파구이자 위로는 오로지 술과 노래였다.
70년대 유신헌법이 조스의 아가리처럼 청년 정신을 난자할 때, 그는 필자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볼 때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조동진의 '겨울비', 박상륭의 소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살고 싶었는지모른다.
◆그의 도반들
1980년 해병대 제대 후 사회 부적응자였던 자식의 한심한 모습을 보다 못한 부친이 그를 직업전선으로 강제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가 선택한 가장 유효한 도피처는 대학이었다. 그는 시간을 벌기(위기 탈출) 위해 불과 3개월을 앞두고 경북대 음악학과(1회)에 지원, 기적적으로 입학한다. 그에게 석 달 동안 피아노와 화성악을 레슨해 주었던 이는 전인권의 사촌 형인 이철웅 교수(서울예대)이다.
어쩌다 들어선 대학시절 학교 북문에 '마루'(누구나 와서 쉬어가는)라는 이름의 카페를 오픈했다. 그 반지하 공간은 누구든 자유롭게 와서 '세기말 앓이'를 공유했다. 조기현 시인을 비롯한 경북대 복현 문우회를 주축으로 대구의 일단의 시와 그림 동인 모임과 초 소극장, 운동권 학생들의 스터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에서 내사가 들어와 학교 측에서 폐쇄 권고가 있었으나 불응하자 건물주를 압박한 끝에 2년여 만에 쫓겨나게 된다. 아마도 당국에서 재학생들보다 일곱 살이 많아 그를 그 그룹의 보스라 여겼던 모양. 기실 그에게 대학시절은 하나의 일탈(?)이자 별책 부록 같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통렬한 벗이 몇 있다. 첫 손에 꼽히는 사내가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천하의 문무상'이다. 워낙 기가 세고 확고한 자기 메시지를 갖고 있어 누군가 '천하'란 수식어를 붙였다고 한다. 당시 대구 포크의 아이콘이자 히피답게 송죽극장 뒷골목의 한 여관에 장기투숙하고 있었다. 그의 음색은 정말 특별했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굳이 말하자면 밥 딜런과 조 카커의 음색을 섞어놓은 듯한, 근원적 감성 아니 존재를 뒤흔드는 듯한, 아쉽게도 지금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전설로 남았다. 당시 코리아음악감상실에서의 그의 노래와의 첫 조우는 사람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압도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울림이었다고 절친 이무하는 회고한다. 이후 한 지인의 소개로 문무상이 묵고 있던 여관방에서 자신(무하)의 노래를 그(무상)에게 들려 주었을 때 매일 소주를 대접할 테니 놀러 오라는 그의 말대로 둘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했고 술이 고프면 만경관 뒤에 있었던 카페 '처용'에서 대구의 히피들과 노상 어울렸고 문무상은 군 제대 후 그의 음악의 열렬한 마니아였던 한 여인과 결혼하고 삼덕성당 옆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해 오픈한 레스토랑 '엑스트라'(1982~86년)에 닻을 내렸다. 엑스트라는 당시 처용, 올림프스 등과 함께 대구 히피들의 성지였다. 훗날 들국화 대구 공연 때도 뒤풀이 장소는 언제나 엑스트라였다. 이때 함춘호, 하덕규 등도 함께했다.
이무하가 만든 곡 '끊어진 길'은 분단의 아픔뿐 아니라 하늘(창조주)과 땅(피조물)의 단절, 사람과 사람·사람과 자연의 깨어진 관계를 말한다. |
이무하가 작사·작곡한
김광석의 '끊어진 길'
높푸른 하늘 희고운 구름
먼 산허리 휘돌아 흐르는 강물
아무 말 없어도 이젠 알 수 있지
저 부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그 길 끊어진 너머로
손짓하며 부르네 음 음
이 아름다운 세상 참 주인 된 삶을
이제 우리 모두 손잡고 살아가야 해
(하략)
◆정태춘·조동진·김민기와의 인연
1975년 문무상이 코리아에서 노래할 때 그의 소개로 함께 노래했던 전인권과 만나게 된다. 전인권이 대구에 머문 시간은 도합 1년6개월 남짓. 그가 상경하기 전날 밤 문무상의 집 옥상에서 통기타를 치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중 '두 무(무상·무하)'의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라는 노래 모임에서 가요평론가 이백천, 작곡가 이주원, 가수 강인원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이주원과 강인원이 처용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수년 후 하덕규는 엑스트라로 찾아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음에 만난 인물은 우리 시대 대표적 포크 뮤지션 정태춘이다. 1977년 즈음 군(해병) 휴가 중에 한 후배가 찾아와 도넛 앨범에 수록된 두 곡의 노래를 들려 주었는데 김민기, 문무상 이후로 또 다른 형태의 큰 울림이었다. 동시대 한국적 시대 정신과 정서를 담은 토속적 보이스였다. 이후 다음 휴가 때 그 후배의 소개로 (가끔 무대에 서곤 했던 )무아음악감상실로 정태춘이 찾아와 첫 만남이 있었고 역시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40년 막역지우이다.
매해 여름 휴가를 아내 박은옥과 외 딸 새난슬과 함께했고 자주 잠실에 있던 그의 집에서 어느 땐 보름씩 머물기도 했다. 그와 정태춘은 서로 사상적 음악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 모두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왔고 1980년 중반 전교조 지원 공연 '누렁 송아지'에 참여하고 그의 앨범 '무진 새노래'에서 '고향집 가세'란 곡에 피처링하기도 했다. 1987년 이무하는 기독신앙으로, 정태춘은 운동권의 핵심으로 각자의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은 주류 제도권 교회에 실망하고 초대교회로의 회복과 또 한 사람은 민주화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에 대한 통렬한 문제 제기와 함께 4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세 번째 인물은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 포크 음악의 원조이자 큰 산 조동진이다. 들국화 대구 공연 때 처음 만났고 정태춘의 주선으로 그의 첫 앨범 '고향'이 한국음반을 통해 제작됐으나 조동진이 그때 하나뮤직을 만들면서 그와 함께할 것을 권하여 하나음악 로고로 재인쇄,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 음반이 나온 날 하나뮤직 식구들과 함께 사무실 겸 스튜디오에서 합평회를 열었다. 그때 그의 생에 가장 극적인 만남의 하나로 스튜디오에서는 한국 포크음악의 심장이자 상징과도 같은 김민기가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함께 1993년 출시된 역사적인 김민기 전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날 김민기도 이무하의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을 모두 듣고는 '내 혈액형에 맞는 음악이네. 음반 하나 주시오. 조만간 연락할 일이 있을거요'라고 후배의 음악을 지지해 주었고 며칠 후 학전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하자고 제의를 해왔다. 만년 지하에서 암약하다 처음 온 그라운드를 밟은 그는 심히 부담이 된 나머지 1집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하덕규와 상의 끝에 하덕규, 신형원, CCM 가수 송정미 등 4명이 함께 하게 된다. 이후 김민기는 그에게 자신이 제작 연출하는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제안했으나 당시는 신앙에 과몰입해 있던 때라 정중히 사양했다는….
그 외 다른 뮤지션들과의 인연은 그가 써 두었던 노래 중 장필순과 먼저 세상을 떠난 김광석이 각각 '길'과 '끊어진 길'을 그들의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이무하의 1집 '고향'(위)과 4집 '그리움'의 앨범 표지. 1집은 한국음반에서 발매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으나 조동진의 간곡한 요청으로 하나음악에서 내게 됐다. |
음악은 돌파구이자 위로
내면의 광야에 빠져있던 청년기
대구 히피 성지서 문무상과 노래
전인권이 녹음해 가서 유명해져
제대 후 부친이 취직시키려 하자
전인권 사촌형에게 화성악 배워
경북대 음악학과 석달만에 입학
포크 거장과의 인연
1집 두고 음반사 2곳 '줄다리기'
조동진 요청에 하나음악에서 발매
'우상' 김민기, 단독콘서트 제안도
김광석·장필순, 그의 곡 앨범 수록
정태춘과는 40년지기 프로젝트중
한손엔 기타, 다른손엔 성경
기독음악 앨범도 두차례 발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생에 대한 근원적 질문 탐구
◆나의 영성투어
1987년 뜻하지 않게 기독 신앙을 갖게 되면서 대구 집에서 어렵사리 숨은 신자로 지내다 하덕규의 권유로 1992년 서울에서 첫 음반 '고향'을 낸다. 대상은 이전의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포함한 세상이다. 주제는 다름 아닌 잃어버린 고향과 어린 시절을 비롯한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신앙 안에서의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와 돌아가야 할 본향으로서의 새하늘 새땅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다.
1997년부터 2003년 초반까지 다수의 기독음악 사역자들과 '부흥'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통한 예배 운동에 함께 해 전국 순회공연과 해외공연에 참여한 바 있다. 더불어 솔로로 1996년, 2007년 두 장의 가스펠 앨범을 내고 2014년 다시 세상을 향한 노래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앨범에는 이른바 CCM(동시대적 기독교음악)계의 조동진이라 불리는 뛰어난 또 한 사람의 뮤지션 최성규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주제는 역시 잠시 이 땅에 머무는 나그네로서의 삶과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언젠가 떠나온 그곳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노래의 본령은 요즈음 찾아보기 힘든 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이며 누군가 또한 어디선가로부터 떠나온 자로서의 그 무엇에 관한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가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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