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필자 주택청약 가점 두고
윤석열-유승민 '복붙' 시비
변형·모방 능력 부재에 기인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피카소 아포리즘 반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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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완 칼럼 논설위원 |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추상화의 전설 파블로 피카소가 남긴 명언이다.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도 자주 인용한 경구다. 앞부분에 "나쁜 예술가는 표절하고"라는 문구를 추가해 읽어도 무리가 없겠다. 피카소는 아마도 생략법을 쓰지 않았나 싶다. 아포리즘은 간명해야 맛깔나니까.
'훔친다'는 말이 키포인트다. 심대(深大)한 함의가 있다. 명장이나 고수를 모방하되 그들의 혼과 기술까지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설가 복거일이 비슷한 말을 했다. "작가는 어차피 남의 얘기를 빌려올 수밖에 없다. 다만 화학적 결합을 통해 자기 얘기로 소화해야 한다." 돈이나 물건을 훔치면 범법행위이지만 정신영역에선 훔치는 게 능력이다. 지혜와 지식은 많이 훔칠수록 득이다. 야구도 잘 훔치면 안타 없이 2루·3루 심지어 홈까지 들어오지 않나. 차세대 전투기에 장착된 첨단 기능이 왜 스텔스(stealth)일까.
국민의힘 대선 후보 간의 공약 표절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윤석열 후보의 '군복무자 주택청약 5점 가점' 공약에 대해 유승민 후보가 자신 공약의 '복붙'(복사+붙여넣기)이라며 발끈했고, 시비 와중에 '윤도리코'란 조어까지 등장했다. 윤 후보 측이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분석해 나온 공약이라고 해명하자 유 후보가 분석 자료를 요구했고 윤 캠프에선 공약 설계에 참여한 인터뷰 대상자 명단만 공개했다. 유 후보는 "동문서답"이라며 공방을 이어갔다.
맥락이 흡사한 공약은 부지기수다. 기본소득은 이재명 후보의 대표공약이다. 이 후보의 정책적 메시지와 경제철학이 녹아 있다. 하지만 이재명이 기본소득 공약에 IP(지적 재산권)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후보 시절 공약이었던 안심소득은 기본소득의 변형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음의 소득세에서 창안한 아이디어다.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기 전 정세균 민주당 후보가 내걸었던 '청년 미래 씨앗통장'도 선별적 기본소득이랄 수 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소득 하위 70% 고령자에 대해 월 20만원 노령연금 공약을 제시하자 박근혜 후보는 65세 이상 고령자 모두에게 월 20만원 기초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진보보다 더 진보적 공약이란 평가가 나왔고, 중도층 표심(票心)을 견인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당선 후 재정 핑계를 대며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어쨌거나 기본소득이든 기초연금 공약이든 표절 논란은 없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지 못하느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의 시조다. 한데 중장(中章)이 이백의 시 '술을 권하며' 앞부분과 흡사하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저 물 천상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음을.' 그러나 이걸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唐詩)에 매료됐던 황진이가 달과 술의 시인 이백의 작품을 보며 시작(詩作)을 했을 터이고, 이백의 사조(思潮)가 자연스레 황진이의 시심(詩心)에 녹아들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 판단일 것이다.
그대로 갖다 붙이면 표절이지만 '기술'을 입히면 모방이 된다. 윤석열 캠프는 변형의 기술이 없었나 보다. 예컨대 '군필자 1천만원 기본통장+주택청약 3점 가점'으로 살짝 변형했더라면 '복붙' 시비에 휘말릴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한나라 문인 양웅은 '논어'를 오마주 삼아 법언(法言)을 짓고 '주역'을 본떠 태현(太玄)을 편찬했다. 제대로 훔쳤기에 역작을 남겼다. 훔칠 능력이 없다면 모방의 '기술'이라도 덧대야 한다.
박규완 칼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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