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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윤 편집국 부국장 |
예전에 '지방식민지論'이란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오래된 2010년이었다. 그 칼럼에서 강준만 교수의 '지방=내부 식민지' 주장을 다뤘다. 물론 전적으로 공감하는 입장에서였다. 사실 그의 저서(지방은 식민지다)는 지방 문제를 다룬 책들 중 압권이라 할 만했다. 지방이 서울공화국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한 '불편한 진실'을 속속들이 까발렸으니. 지방에 대한 식견과 애정,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날 선 주장은 시대적인 요구에도 부합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균형발전 정책을 사실상 폐기하고 수도권 몰아주기(규제완화)에 열을 올렸다. 그때 지방민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아우성치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방은 어떤가? 뭐라도 좀 나아진 게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날이 번창하는 '서울공화국'하에서 '지방 식민지'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일부 관련 지표만 봐도 도저히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서울권의 다른 이름인 수도권 면적은 국토의 12%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인구와 지역내총생산(GRDP) 규모는 비수도권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또한 대기업 본사와 주요 대학 80%, 예금 70%, 정부투자기관 89%를 독식하고 있다.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셈이다. 반면에 지방은 수도권 블랙홀에 휩쓸리는 '소멸의 땅'이다.
수도권의 풍요는 비수도권의 희생을 강요하는 수탈적 체제의 산물일 뿐이다. 피식민지가 그렇듯 지방은 서울의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력과 재화를 바쳐야 하지 않는가. 지방의 내부 식민지화는 분권과 공정의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부조리한 현상이다. 하지만 개선되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의 역주행을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형국이다. 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위기의식이 11년이나 지난 칼럼을 소환한 배경이다.
특히 문재인 정권에서 지방이 이렇게까지 쪼그라들지 몰랐다. 문 대통령은 집권 전부터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외쳐왔다. 하지만 공허한 메아리였다. 균형발전 정책을 기대했던 지방, 특히 대구경북은 김칫국만 연신 들이킨 꼴이 됐다. 문 정권이 지방분권 개헌을 하는 시늉만 하다가 접을 때부터 조짐이 불길했다. 역시 그 이후부터 우려가 현실이 됐다. 구미시는 SK하이닉스(반도체클러스터) 유치에 사활을 걸었지만 용인시에 고배를 마셨다. 대구시 역시 '이건희 미술관'이 서울로 결정됐다는 발표를 허망하게 바라봐야만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 정권은 대선 공약이었던 수도권 공공기관 2차 지방이전 약속도 파기했다. 지난 몇 년간이나 해줄 듯 말 듯 질질 끌다가 국민에게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것이다.
이처럼 지방에 의문의 패배를 안기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쩌면 예견된 수순일 거라는 강한 의심이 든다. 수도권 카르텔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 정권 실세인 그들이 애초부터 지방을 배제키로 짬짜미했다면 그 결과야 뻔하다. 여기에다 부동산 정책 참사로 인한 수도권발 집값 폭등은 지방 서민을 '벼락 거지'로 만들어 버렸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게 이 정권의 습성이라지만, 지방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진다. 문 정권의 균형발전은 실패한 게 아니다. 시도를 했어야 성공이든 실패든 할 게 아닌가.
지방분권을 공언한 문 정권 들어 지방 식민지화가 더욱 가속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알다시피 최대 피해자는 지방 서민층과 청년세대다. 그들은 서울 밖의 촌에서 태어나 그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 '서울민국'이 통치하는 비정상의 나라에서 과연 누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허석윤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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