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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우의 나의 기타이야기] 70년대 통기타 황금기, 포크와 록뮤직의 추억

2022-01-07
고(故) 이종환 DJ가 운영했던 라이브클럽 쉘부르 광고.

통기타의 황금기였던 1970년대를 나의 추억 속에서 찾아봤다. 고교 3년간 기타를 좋아했던 결과는 참담했다. 아버지의 끝없는 분노를 샀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서울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당시 종로3가에 고등학교 선배와 형제가 운영하는 악기 수리 전문점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수리를 마친 고급 기타들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기에 나에겐 천국이었다. 난 최근에 중고 기타들을 거래하며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정교한 튜닝을 직접 해 볼 수 있었다.

그 무렵 나와 같은 입시학원을 다니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의 큰오빠가 라이브클럽을 하는데 소개를 해주겠다고 했다. 더 이상 가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무교동 라이브클럽 '석굴암'에서 그녀의 오빠를 만났다. 날카로운 인상과 가슴의 문신이 그의 신분을 암시했다. 이후 나는 그녀 오빠의 후원으로 오디션도 없이 무교동 일대의 무대를 거치게 되었다.

첫 프로 무대에 출연하며 깨끗한 중고기타를 전투용(무대용)으로 구입했다. 1970년 모델 '야마하 레드 라벨 FG150'이었다. '야마하 포크기타'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FG 180과 FG 150의 1972년 3월 이전 모델들은 최근 일본에서 빈티지기타 열풍의 중심이 되었고 수집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70년대 중반 무교동 부근에 있었던 라이브무대는 꽃잎, 코러스, 약속, 타임, 석굴암, 아이엠유, 초가집, 팔도강산, 선비촌, 선샤인, 쉘부르 등이 기억에 남는다. 종로2가의 '쉘부르'는 이후 75년 11월경 명동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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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우 싱어송라이터

무교동에 나간 얼마 뒤 종로의 '쉘부르'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셨다. 자존심을 다친 나는 그날 이후 쉘부르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대책 없던 그 자존심은 성장환경 탓이겠지만 쉘부르는 출연진의 고정급여가 없었기에 미련은 없었다. 가수 남궁옥분과 이문세는 1970년대 후반 명동의 쉘부르 오디션에서 수없이 떨어지고도 재도전을 했다.

친구인 포크싱어 김홍경(버들피리 리더)은 종로의 쉘부르에서부터 노래를 했고 '눈이 큰아이' 등 많은 곡을 작곡했다. 대전에서 클럽을 운영 중인 그와는 지금도 자주 연락하며 그 시절을 공유한다.

당시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를 제외한 라이브업소는 춤을 못 추게 했다. 하지만 신나는 곡이 나오면 다들 일어나 춤을 췄다. 그러다가 단속반이 떴다는 신호를 하면 손님과 종업원, 심지어 가수들까지 합세하여 순식간에 탁자를 정리하고 앉아서 팔만 흔들었다. 일명 '앉은뱅이 고고'다. 단속반이 지나가면 '그건 너~ 너 때문이야~'라며 이장희의 금지곡 '그건 너'로 야유를 보냈다.

몇 개월 후 나를 찾아낸 가족의 간절한 설득에 무대를 떠났다. 친척 모두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해주었다. 그러나 계절이 두 번쯤 바뀐 뒤 난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종로 세운상가의 '아마존'에서 오후 타임을 마치고 저녁에는 '약속'과 '석굴암' 무대에 섰다. 무교동 시절의 여자가수 중에는 '핫세' 머리를 하고 다니던 윤연선이 유독 생각난다. 나중에 그녀의 타이틀곡 '고아'는 금지곡이 되었고 '얼굴'은 히트했다.

내가 잠시 무교동을 떠났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가수 김수철이 석굴암에서 일당 2천500원에 가발 쓰고 기타를 치다가 결국 학교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리랑 담배가 35원이던 시절, 그 일당은 큰돈이었다.

1975년 12월에 첫 대마초 사건이 터졌다. 통기타 가수들과 그룹 출신의 가수들이 50명 이상 잡혀갔다. 내 주변의 가수들도 수사대상으로 줄줄이 불려갔다. 그 당시 난 포크듀엣 사월과 오월이 운영하던 명동의 '옹달샘'과 무교동을 오갔는데 다운타운 통기타가수들은 실적 위주의 경찰수사 때문에 다들 불안했다. 막 피어나던 한국의 포크와 록뮤직은 이때부터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그 무렵 부산에 내려가서 노래하던 친구한테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며칠 후 부산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김혜우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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