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오라이~" 외치던 버스 안내양
일반 시내버스 요금, 50년간 125배 상승
승객감소 경영난, 준공영제 전국 첫 도입
1997년 도시철도 1호선 진천~중앙로 개통
버스정류장 LED 도착안내기·환승무료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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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시철도 1호선. <영남일보 DB> |
대구시민의 발은 버스와 도시철도다.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구에 선을 보인 버스는 지금까지 묵묵히 역할을 수행했다. 1990년대 후반 대구에서 운행하기 시작한 도시철도는 버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건 물론 또 다른 대구시민의 발이 돼 주었다. 70여 년 동안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고 있는 대구 대중교통의 변화를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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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시내버스 승차 모습. <영남일보 DB> |
◆30여 년 동안 지역의 유일한 대중교통이었던 시내버스
대구에서 버스가 운행된 시기는 1912년 7월1일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다. 대구호텔의 주인이던 베이무리 다마치로가 일본 버스 4대를 들여와 7전을 받고 운행했다. 대구역을 기점으로 시내 각 방향은 물론이고 팔달교와 동촌까지 운행했다.
1950년대는 미군 폐차, 드럼통, 일본 중고 엔진을 이용해 수공업형태의 버스를 제작하던 시기였다. 쌍용자동차의 모체인 하동환공업사와 옛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신진공업사가 생겨났다. 1960년대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에 힘입어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자동차보험도 도입됐다. 1962년 신진공업사에서 개발한 16인승 버스는 1963년부터 대량 생산됐다. 또 같은 해에는 대형버스를 규격화했는데 중간과 뒷부분 2곳에 문이 있는 형태였다. 1968년 교통부에서는 일시적으로 버스면허를 개방해 자유롭게 증차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버스 대수가 2배로 폭증하면서 노선 경쟁이 벌어졌다. 1970년대에는 리어엔진 시내버스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운행됐고 1979년에는 좌석버스 제도가 도입됐다. 리어엔진 시내버스가 도입되면서 앞문이 생겨났다. 1970년 1월 대구의 일반 시내버스 요금은 10원이었다. 현재 교통카드 기준 요금 1천250원과 비교해보면 50년간 125배 올랐다.
1970~80년대 버스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유일한 대중교통인 탓에 출·퇴근 시간에는 어김없이 만원이었다. "오~라이"라고 외치던 버스 안내양은 진한 남색 등의 제복과 모자를 착용했으며 엄격한 필기시험과 구술면접을 거쳐 선발됐다. 당시 버스안내양의 인기는 엄청났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버스 안내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1980년대부터 안내양 없이 승객이 앞문 승차, 뒷문 하차하고 요금을 선불로 내는 시민자율버스 운행이 시작됐다. 대구시에서는 1982년 9월10일 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국일여객, 신일여객, 관음교통, 극동버스, 동광버스, 대현교통, 영진버스 등이 시민자율버스를 운영했다.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을 통해 버스 안내양 고용 의무조항이 삭제됐다. 애환을 함께 나누던 버스 안내양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에는 버스 좌석에 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들의 소지품을 받아주던 시절이었다. 중·고교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 간 탓에 가방 안에 반찬통을 함께 넣어두곤 했는데 좌석에 앉은 승객이 학생 가방을 받아주다 반찬통에서 김치 국물이나 양념이 흘러 옷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했다.
이 시절 대구시내버스는 불친절의 대명사였다. 운전기사가 기분 좋으면 6~7분, 기분 나쁘면 최대 30분까지 벌어지는 배차 간격, 손님 옷으로 좌석 청소, 정류소 아닌 곳에서 승객 탑승 등의 행위가 빈번하게 이뤄졌다. 특히 버스에 사람이 너무 많으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승객을 한구석으로 몰아버리기도 했고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오래 서고 손님 없는 곳에서는 멈추기가 무섭게 출발해 내리는 사람이 도로에 나뒹굴어 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지역 언론에 나온 기사다. "경북도는 1970년 10월21일부터 특별지도반을 편성해 서비스 상태를 점검한 결과, 531대의 대구 전체 시내버스 중 283대에 개선지시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기미가 전혀 없어 11월1일에 대다수의 차량에 대해 운행정지 처분을 내리는 강경책을 발표했다."
1990년 1월 대구에서는 시내버스 공동배차제가 시행됐다. 대구시는 1998년 5월5일 대구시 시내버스 번호를 권역별 세 자리로 바꾸면서 앞 숫자는 출발지역, 두 번째 숫자는 경유지역, 세 번째 숫자는 도착지역 이런 식으로 통일했다. 초기에는 시민들로부터 "멀쩡한 번호를 왜 바꾸냐"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이렇게 바뀐 덕분에 정확한 버스 번호를 모르더라도 번호가 상징하는 지역만 알면 버스 이용을 잘할 수 있게 됐다.
1997년 대구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되면서 유일한 시민의 발이었던 버스는 무거운 짐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국민소득 향상으로 자가용 운행이 급증하면서 승객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이 같은 환경변화는 업계의 경영난을 가중시켰고 대구시는 2006년 2월18일 시가 운영자금을 보전해주는 준공영제를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 이와 함께 공동배차제를 폐지했다. 준공영제 시행과 더불어 노선 체계를 좌석·일반·마을버스로 구분하던 것을 급행·순환·간선·지선으로 구분했다. 시내버스운행관리시스템(Bus Management System, BMS)을 구축해 각 버스정류장에 LED 도착 안내기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경산시 시내버스와 환승무료할인제가 적용됐다.
유선태기자 youst@yeongnam.com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대구대중교통 변천史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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