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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타워]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비극

2022-02-17

[영남타워]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비극
박진관 편집국 부국장

지난 5일은 입춘 추위답게 칼바람이 매서웠다. 강추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제단 위 떡국도 금방 식어버렸다. 하지만 위령탑 앞에 서 있는 제주(祭主)들의 뜨거운 마음마저 얼어붙게 할 순 없었다.

이날 10월항쟁유족회 초청으로 가창댐 아래 10월항쟁 및 6·25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을 찾았다. 9년 전 쓴 특집 기사 덕분에 유족회와 인연을 맺은 이후 가끔 연통이 오는데, 겸사겸사 참석했다. 10월항쟁유족회에선 오래전부터 매년 설과 한가위를 전후한 주말에 억울하게 희생된 조상께 합동 차례를 지내고 있다. 이번 설차례는 작년 위령탑 완공 후 처음 맞는 명절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유족회원들은 올해 초에 '제6회 민주시민상' 을 받은 데다 유족회 사무실까지 마련했으니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차례가 끝난 뒤 위령탑 비문에 새겨진 573명의 희생자명단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독립운동가 채충식 선생의 장남이자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의 선친 채병기 선생,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 선생이 보였다. 그중 '김일식'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김일식은 6·25전쟁 즈음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있다니…, 눈을 비비고 다시 망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김일식은 아버지 김영우, 할아버지 긍석 김진만과 더불어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대구고보 재학 시절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인 구화회(丘火會) 등에 같은 대구고보생인 황보 선(현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외조부), 장적우(본명 장홍상, 현 장세용 구미시장 조부), 김성칠(역사학자 김기협 부친) 등과 참여했다. 1928년에는 일본인 교사의 이순신 장군 폄하발언을 계기로 벌어진 대구고보의 동맹휴학에 연루돼 퇴학당했다.

김일식은 1930년대 독립운동을 벌이다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아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가 갇힌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복 후 1946년 8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열린 광복 1주년 기념식 때 대구 독립운동가 대표로 사회를 맡기도 했으나 6·25전쟁 때 가창골에서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식의 아버지 김영우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는 아버지 형제(김진만·김진우)를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의 동생 또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28년 사망했다. 김영우는 안중근 의사의 사위 황일청으로부터 국내에 폭발물을 반입해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려다 발각, 투옥돼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31세에 순국했다.

김일식과 김영우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은 김진만에게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대구 반월당에 살던 김진만은 앞산 안일사에서 조직된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16년 독립군자금 모금을 위해 장인인 대구부호 서우순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동생이 권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피해 다니다가 결국 붙잡혀 동생은 징역 12년, 자신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다. 당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대구권총사건'이다.

안타까운 건 그의 처남이자 서우순의 아들 서상준도 함께 거사에 참여했는데, 독립운동과 부정(父情)에 대한 갈등 탓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김진만과 김영우 그리고 김일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구의 명문가다. 비극으로 끝나버린 이들의 명예를 우리는 언제쯤 제대로 현창할까.
박진관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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