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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고대 대구의 중심, 달성고분군

2022-07-01

금동제 관·관모 등 부장품 확인…주피장자 높은 신분 시사
6·25 이후 민가 들어서면서 대형고분의 모습 점차 잃어버려
1999년 목조 집터서 유물 발견…4세기 목곽묘 2기등 조사
하부에 유물 추가 존재 가능성…달성역사 밝힐 유일한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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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고분군 51호분 전경.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대구지역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 볼 때 대구의 중심은 달성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달성고분군은 1923년 강흥주(姜興周)라는 인물이 현재의 서문시장 부지에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토사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고분 봉분이 파괴되었다. 이를 계기로 1923년 일본인 고이즈미아키오(小泉顯夫), 노모리켄(野守健), 순이치(澤俊一) 등에 의해 봉토가 남아있던 34호·37호·50호·51호·55호·59호·62호분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총 87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는데 이에 대한 측량을 실시하였고 그 자료가 남아있어 봉분의 규모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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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고분군 37호분 1곽 출토 금동관.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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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고분군 55호분 출토 금동안교.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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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고분군 55호분 출토 장식대도.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달성고분군은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에는 '달서면고분군'으로 명명되었다가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大邱府)에 편입되자 '비산동·내당동고분군'으로 불려졌다. 하지만 '비산동·내당동고분군'이라는 명칭으로는 이 고분군의 전체 범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달성(達城) 유적'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최근에는 '달성고분군'으로 부르고 있다.

달성고분군의 봉분은 대개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일부 표형분도 보인다. 봉분의 크기를 보면 대형(직경 16m 이상)이 18기, 중형(8.5~15m 정도)이 41기, 소형(8.5m 이하)이 17기 확인된다. 묘의 형태는 주곽과 부곽으로 구성된 경우 주부곽을 '丁'자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주곽을 단독으로 축조하기도 하였다. 묘의 구조는 수혈식 또는 횡구식이며 돌로 곽을 짠 석곽묘가 대부분인데 크기가 아주 큰 판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주피장자를 위한 부장품으로는 금동제 '出'자형 관과 관모, 조익형 관식, 이식과 경식, 대장식구, 식리, 삼엽환두대도 등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유물은 주피장자가 신라의 지방에서 최고 지배자의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달성고분군은 5세기 중반에서 후엽에 집중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달성고분군의 고분 배치를 보면 총 7개소의 무리(群)로 나누었는데 이를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달성 성벽의 남쪽에 위치하는 대구 대성초등 서쪽 일대에 6∼11호분(Ⅳ군)이 위치하였다. 대성초등의 남쪽 큰장네거리 방향으로는 43∼49호분(Ⅴ군)이 축조됐다. 큰장네거리에서 새길시장 방향으로 난 능선을 따라 길게 큰 고분이 줄지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34∼42호분과 50∼70호분(Ⅱ군)이 확인됐다. 새길시장에서 반고개로 넘어가는 언덕, 현재 내당천주교회 부근에는 71∼82호분(Ⅵ군)이, 구 대영학원(현 세종마트)에서 대구 서도초등으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83∼87호분(Ⅶ군)이 확인됐다. 대구 제일고의 남쪽 비산4동 행정복지센터 부근의 구릉에는 12∼33호분(Ⅰ군)이 축조됐으며 대구 서부초등과 달성의 서벽 사이에는 1∼5호분(Ⅲ군)이 확인됐다. 이처럼 달성고분군은 달성(공원) 정문 복개도로에서 큰장네거리를 지나 새길시장, 반고개 언덕 일부, 구 대영학원(현 세종마트)에서 비산네거리 일대, 대구서부초등을 포함한 달성 서벽 부근까지 총 7개 군집으로 축조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성고분군은 분포와 규모 등에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달성고분군의 규모가 대구의 다른 고분군에 비해 아주 크다는 것이다. 당시 남아있던 봉분 직경이 평균 10여m에 이르고 가장 큰 것은 30여m에 달했다. 이 대형분들은 4~5개의 무리로 나누어지는데 이는 지배자 집단의 내부구조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달성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를 비롯해 금동관, 금제귀걸이, 은제과대 등 장신구류, 환두대도 등 무구류, 운주, 재갈 등 마구류를 포함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동관은 경주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그 형태가 동일한데 이는 대구지역이 신라의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달성고분군은 6·25 한국전쟁과 도시화를 겪으면서 짧은 시간에 그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다.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고분군 주변으로 일부의 민가만 확인되고 있지만 1954년 항공사진에는 Ⅱ~Ⅴ군 주변으로 민가가 집중적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피란민이 기존 민가를 피해 능선 위 고분군 인근에 많은 집터가 새롭게 개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이다. 이후 대구가 대도시로 성장하면서 많은 인구가 이 고분군 주변에서 터를 잡게 되고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달성고분군은 민가 속에 뒤덮여 버리게 되었다.

1999년 늦은 가을, 나는 이 달성고분군 내에 작은 규모의 발굴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비산4동 일대에 소방도로가 개설되고 이 도로에 접하는 23평 정도의 작은 1층 한옥 목조 집터 아래에서 유물이 확인되어 발굴을 진행하였다. 이 발굴에서는 4세기대 목곽묘 2기와 5~6세기 석곽묘 3기가 조사되어 달성고분군이 삼국시대 이른 시기부터 최상위 계층의 집단 묘역임이 밝혀졌고 당시 한옥 목조건물 하부에 유물이나 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발굴조사가 있었으나 달성고분군이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존조치 없이 속수무책으로 이 모든 고분군이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앞으로도 어느 누구도 이 역사를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달성고분군 내에는 아직 재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오래된 단층 건물이나 공지(空地) 등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달성고분군의 흔적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한 조각의 문화유산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달성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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