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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392년, 1592년 그리고 1892년

2022-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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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경 변호사

1392년, 1592년 그리고 1892년

서기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왜구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고려 말 정계의 주요 인물로 떠오른 이성계는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와 횡포를 지켜보면서 이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겉으로는 제후국처럼 왕을 칭하였으나 조선 내부적으로는 황제가 사용하는 태조, 태종이라는 묘호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이 독립국임을 표방하였다. 명나라와 조공형식의 무역을 하였으나 이는 명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는 명의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외교의 하나였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정도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전국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에 따라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장은 너무 혁신적이어서 그대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조선은 나중에 과전법을 시행함으로써 호족의 토지겸병을 막고 자작농을 확충하였다. 세금을 내는 자작농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고 농민들을 이전보다 살찌게 하였다. 조선 건국 세력의 개혁정책은 조선을 부국강병의 독립국으로 시작하게 한 것이다.

서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걸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유럽에서 전래된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17만 명의 왜군은 당시 세계적인 군사력이었다. 조선은 건국한 지 200년이 되면서 사화와 당쟁으로 피폐해졌다.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방어도 못한 채 선조는 단기간에 수도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였다. 조선의 원병 요청을 받은 명나라는 10만 대군으로 참전하였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 사이의 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세계대전급 전쟁이었다.

1597년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왜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은 히데요시의 아들을 지지하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으로 갈라져 일본의 패권을 건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명이 쇠퇴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기자 만주에서는 누루하치가 이끄는 만주족이 흥기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1619년 10만 명의 조선과 명나라의 조명 연합군이 후금을 공격하자 누루하치는 사르후전투에서 날쌘 기병을 앞세워 조명 연합군을 대패시켰다.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1636년 조선을 침공하였다.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인조와 신하들은 입으로만 결사 항전을 외치다가 삼전도의 굴욕으로 청의 반식민지 속국이 되었다. 조선을 복속시킨 청은 명의 수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고 중국을 식민지화하였다.

서기 1892년도는 임진년이다. 조선 건국 500주년이고 고종 즉위 30년이 되는 해여서 궁중에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이 해에 전봉준이 접주로 있던 전라도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하였고 조병갑의 학정에 동학혁명의 싹이 발아하였다. 그때로부터 10여 년은 조선이 힘을 기르고 개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고종은 청과 일본에 요청하여 자신의 백성들인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고 자주독립의 입헌군주정을 요청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군대를 동원하여 해산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개혁되지 못하였고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한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의 선조, 인조, 고종은 무능하고 이기적인 군주들로서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게 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하였다. 지도자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하고 국가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며 자신의 지위와 권력만 보존하려고 할 때 국민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여야 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국민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고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뽑게 된다. 모든 권력의 근원인 국민이 먼저 밝아야 하는 이유다.

박헌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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