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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2022-12-09

집안 길사·농한기 한글가사 창작하며 낭송…명문가 부녀자 놀이문화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쌍벽가는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 때 지은 초기 내방가사다.

내방가사는 조선 후기 영남양반가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한 한글가사이다. 지은이와 창작 연대가 미상인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발굴된 편수는 대략 6,000편에 달한다. 규방 부녀자의 글이라 주로 여성의 예의범절을 읊은 계녀가(誡女歌), 일생을 돌아보는 회상가, 가문을 칭송하는 세덕가(世德歌), 봄놀이 화전가(花煎歌)가 대부분이다. 여성이 쓴 한글이니 문집은 엄두도 못 냈고 필사하여 두루마리나 장책(粧冊)으로 내려왔다.

이렇듯 전근대기에 영남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여성 문학 장르가 생긴 까닭은 무엇인가? 성리학에 경도된 영남 사족들은 부녀자의 글짓기를 선뜻 용인했을까? 낭송으로 향유됐고 필사나 기억으로 전파돼 이본이 많다. 내방가사는 영남 명문가 여성으로서 자기 삶에 대한 자전적 기록인 동시에 여성 주체적 자기표현이다. 오늘날 새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만주 망명가사 중 김우락의 조손별서. 할머니 김우락이 하회 류씨 집안으로 시집간 손녀 유실이에게 보낸 한글가사.

동성마을 문중 부녀자끼리 친밀도↑
한글로 쉽게 창작…집안 풍속 전파
친정나들이 즐거움·가문 등과 칭송
문집 엄두 못내…두루마리·장책 전해

일제 침략기 만주 망명가사도 16편
독립운동 역경, 고국 그리워하며 읊어
근대 넘어오는 길목 조선여인 삶 녹아

◆내방가사의 시원

내방가사의 시원은 16세기 허난설헌(1563~1589)의 규원가로 보고 있다. 글솜씨가 뛰어난 난설헌의 시문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까지 널리 알려졌고 문집도 발간됐다. '엊그제 젊었더니 하마 어이 다 늙거니 소년 행락 생각하니 일러도 속절없다. 늙어야 설운 말씀 하자 하니 목이 멘다'로 시작되는 규원가 이후 거의 이 백여 년 동안 내방가사의 실재는 찾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정조 때 영주의 순천 김씨가 한평생을 돌아보며 회상가로 읊은 1789년의 노부탄, 안동 하회마을로 시집온 서울의 연안 이씨가 장남과 장조카의 동반 급제 기쁨과 가문의 세덕을 읊은 1794년의 쌍벽가가 지은이와 창작 연대가 확실한 초기의 내방가사이다. 영조 때 지은 것이라고 추정되는 안동 권씨의 반조화전가 등 몇몇 작품이 있다. 이 밖에 선산 해평의 북애고택으로 시집가서 13년 만에 안동 친정나들이의 즐거움과 삶을 회상한 진성 이씨의 회심곡, 임청각의 종부 김우락이 지은 만주 망명가사, 향산 이만도 며느리 김락이 쓴 유산일록 등이 지은이가 분명한 내방가사이다. 근래에는 조지훈의 고모, 영양 주실마을의 조애영이 19편의 한글가사를 은촌 내방가사집에 실었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내방가사 특별전시. 국립한글박물관과 한국국학진흥원이 90여 편의 내방가사를 특별전시한다는 포스터.


◆내방가사의 생성과 전승

이처럼 18세기 이후 영남명문가 여성들 사이에 내방가사가 성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영남 사대부가 다른 지방과 다른 몇 가지 특질에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당시 영남 사족은 전부 재지(在地)양반으로 농사에 기반을 두었고 문중을 중심으로 결속돼 있었다. 부녀자들은 수도의 경화 사족과 달리 길쌈을 할 줄 알아야 했고 동성마을로 문중 부녀자끼리 친밀도가 높았다. 곳간 열쇠를 안주인이 관리했고 종부의 권한은 무척 컸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서울 부녀자는 길쌈하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복식을 화려하게 꾸미지만 영남 부녀자는 누에 치고, 삼으로 길쌈하여 무명을 만들어 사철 옷을 손수 장만한다고 했다.

게다가 혼맥이 영남을 벗어나지 않아 '따지고 보면 남이 없다'는 '연비연사(직간접의 친인척·영남 방언)'의 독특한 모습이 생겨났다. 문중 부녀자들은 형제 같았고 당내(堂內)는 한 식구였다. 형제 같은 문중 부녀자들이 삼삼오오 모이게 되니 새로운 놀이문화가 요구됐다. 어느 문중에선가 시작된 한글가사놀이가 딱 적격이었다.

총명하고 부지런한 영남 여성은 예로부터 '글하기'라는 이름으로 한글을 깨우쳐 고전소설을 즐겨 했으므로 한글가사를 쉽게 지을 수 있었고 한 집안의 풍속은 다른 집안으로 쉽게 전파됐다. 시집을 가면서 친정 가사 몇 편을 가져가 시가 쪽으로 전하고 시댁 가사를 친정으로 보내기도 했다.

선비들은 한자 문화를 독점했고 한글은 '언문'이라 하여 천하게 여겨 부녀자의 글이 됐다. 시문과 풍류를 즐기던 영남사족들은 유교문화에 배치되지 않은 부녀자의 한글가사 창작을 반대하지 않았고 나라 안팎도 비교적 안정된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로써 3·4조 음률에 맞게 가사를 짓고 베끼고, 문중 실정에 맞게 고치고 낭송하는 여성 고유의 놀이문학이 탄생했다. 원본을 알 수 없는, 원본이 무의미한 수많은 이본이 만들어지고 성행했다. 필사에 못지않게 기억으로 새로운 작품이 생산됐다. 불완전한 기억은 작품을 각색했고 터진 봇물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여성들은 비로소 오랜 침묵에서 벗어나 말하기 시작했다.

내방가사는 낭송으로 향유된다. 집안의 길사, 가을걷이가 끝난 농한기, 화창한 봄날에 문중 부녀자 여럿이 모여, 초성이 좋은 집안 여성의 낭송으로 공감을 하고 탄성과 찬사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여성 주도의 창작과 전승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문화 활동이 됐고 세계기록유산 국내 후보로 선정됐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위원회 김기배(왼쪽) 의장과 한국국학진흥원 배성길 부원장이 기록유산 등재 인증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하회마을 연안 이씨의 쌍벽가

쌍벽가(雙璧歌)는 하회마을 북촌 화경당의 안주인, 연안 이씨(1737~1815)가 지은 가사이다. 조선 후기 서울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이지억이고 정조 때 영의정 채제공과 내외종 간이다. 집안이 기호남인과 가까워 서울에서 안동 서애 집안과 연을 맺은 특이한 경우이다. 서애 집안은 조선 후기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숙종 때 충청도사를 지낸 우헌 류세명이 1675년 등과한 이후 100여 년 동안 대과 급제자를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정조 18년 1794년 알성시에 서애 종손 류상조, 같은 해 정시에 연안 이씨 장남 류이좌가 급제하여 오랜만에 서애 가문에서 두 사람이 동반 등과했다.

정조는 서애 봉사손과 사촌이 함께 등과했음을 알고 이들을 인견하고, 승지 이익운을 하회에 보내 치제(致祭·왕의제사)를 지내게 하자, 58세 연안 이씨는 그 기쁨과 집안 세덕을 칭송하며 한글가사 쌍벽가를 지었다. 쌍벽은 동갑내기 장남과 장조카를 의미하며 163구절로 된 이 가사는 유려한 문장, 빼어난 구성, 적절한 전고(典故)로 규방가사의 수작으로 꼽힌다. 쌍벽을 봉황과 기린으로 표현했고 삼백 년 서애 가문에 동반 등과를 기뻐했다. 성경현전(聖經賢傳)을 깊이 이해하고 제자백가 글을 암송했으며 서울과 안동으로 오고 간 가르침을 맹모 삼천지교(三遷之敎)에 비유했고 대구법을 즐겨 썼다.

훗날 류상조는 병조판서, 류이좌는 호조참판까지 올랐고 연안 이씨는 정부인이 됐다. 하회의 부녀자들은 서울 할매 쌍벽가를 줄줄 외워 낭송을 못 하는 이 없었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딸은 시댁으로 전파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이본이 6종이나 된다. 이후 많은 영남 문중은 가문을 칭송하는 세덕가를 지어 조상을 기렸고 후손이 잘되도록 기원했다.

◆임청각 종부 김우락의 망명가사

19세기에 영남 내방가사는 문중마다 성행했고 일제 침략기에는 만주로 망명 가서도 가사를 지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만주 망명가사는 16편이다. 그중 안동 임하의 내앞마을 출신으로 석주 이상룡과 혼인을 맺어 임청각의 종부가 된 김우락(1853~1933)이 지은 가사가 4편이다. 석주가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1911년 서간도로 망명갈 때 김우락도 함께 떠났고 만주 망명지에서 해도교거사, 정화가, 간운사, 조손별서 등 4편을 지었다. 이에 대한 답가로 올케 영양 남씨가 지은 답정화가, 손녀 고성 이씨 유실이가 지은 답사친가가 있고,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인 막내동생 김락이 지은 유산일록, 손자며느리 허은이 지은 회상이 모두 김우락과 관련 있는 내방가사이다.

해도교거사(海島僑居詞)는 망명 첫해 가을, 만주 유하현에서 처음 지은 가사인데, 해도는 사해(四海·중원의 별칭) 밖의 섬이고 교거는 임시 거주이니 '외진 만주에 머물며 지은 글'이다. 안동에서 간도 망명길, 고달픈 만주 생활, 독립운동의 고난과 역경을 읊었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남양반가의 내방가사

정화가(情話歌)는 같이 망명한 큰오빠 백하 김대락이 만주 통화현에 살고 있어 오랜만에 찾아가 친정 가족과 재회 기쁨을 노래한 정담가사이다. '어와 며느리들 고향 근심을 치우고 나와 함께 놀자'고 하니 올케 영양 남씨가 답가 '답정화가'를 지었다.

간운사(看雲詞)는 길어지는 만주 생활로 고국에 있는 동생들이 그리워 고국 가는 인편에 편지글 대신 평소 잘 짓는 가사로 대신하고자 열흘간 공들여 창작했다. 칠 남매가 부모 은덕 아래 함께 했던 기억과 핏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우리 남매는 죽든지 살든지 잊지를 말자. 생과 사는 하늘의 뜻이니 낸들 어찌 면하겠냐만 천당으로 돌아가서 부모 슬하에 다시 모여 손잡고 눈물 뿌리며 희소담락 하자고 서간도에서 고국의 핏줄을 그리워했다.

이처럼 내방가사는 조선 후기 영남 양반가 여성의 놀이문학이었고 여성의 자전적 기록이다. 근대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 들꽃처럼 살다 간 조선 여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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