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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 (변호사) |
왕족과 양반 그리고 평민과 노비를 제도적으로 구별하는 반만년의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은 평등의식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국회의원쯤은 물론이고 대통령도 술자리에서는 그놈 소리를 예사로 들어야 하고, 퇴근 후 직장인들 사이 사장님 뒷담화는 일상다반사다. 학생들이 별명을 부르며 꼰대라고 놀려도 듣는 선생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픽 웃고 만다. 일전 우리 대통령도 갓 난 어린 짐승을 뜻하는 비속어를 내뱉은 탓에 나라가 좀 시끄러웠지만 사과 한마디 없이 상황 끝이었다. 왕족과 귀족이 있는 영국이나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불안할 정도로 역동적인 우리 모습인데, 좋게만 본다면 이 기질이 빨리빨리 문화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원동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철폐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이었으니 그때부터 128년이 지났다. 그리고 헌법은 만들어질 때부터 현재까지 '사회적 특수신분'의 창설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특수신분 대우를 받는 분들이 계신데 바로 '귀족노조'라고 불리는 노동조합이다. 먹고살기 어렵다면서 화물운송을 거부하고 아스팔트 위로 나선 분들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성일종 여당 정책위원장님은 수시로 '귀족'이라고 공표하고 계시니, 정말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분들답다는 생각에 존경심이 절로 난다. 반면 귀족으로 불린 그분들은 겸손하게도 그 호칭을 극력 마다하고 있어 정말 훈훈한 정부와 노동조합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법이 만민평등을 규정하고 있으니 달리 특별대우를 해드릴 수는 없지만, 힘들고 위험한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집단은 귀족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난 늘 생각한다. 그분들이 없으면 우리가 맛난 것을 먹을 수 없고 따뜻한 집과 옷을 누릴 수 없다. 제시간에 약속 장소에 댈 수도 없고 청결한 화장실을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조금만 더 과거로 가보면, 컴컴한 골방에서 미싱을 탔던 누이들,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잔업에 특근까지 마다하지 않고 땀 흘렸던 형님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나마 누릴 수 있는데, 만약 이걸 부인하는 자가 있다면 상놈 대우가 마땅하리라. 귀족은 원래 우아하고 고상하며 귀티가 나야 한다. 그런데 고위 관리들께서 귀족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르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 드리지 않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귀족 앞에 '강성' 운운하는 표현을 붙이거나 강제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든지 하는 것은 귀족에 대한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원래 귀족은 명예로워야 하고 관리들의 명령에 의해 일터로 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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