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복원 역사를 품은 도시는 물론
'슬로베니아의 가우디' 플레츠니크 등
건축가·건축사조로 인한 공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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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국립 대학 도서관 전경. 건축가 플레츠니크는 지진으로 파괴된 건물 조각을 모아 그 남겨진 기억을 이 건물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효형출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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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수 지음/효형출판/352쪽/2만원 |
런던, 파리, 로마 등은 유럽을 처음 찾는 이들이 꼭 여행 일정에 포함시키는 도시들이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도시의 아름답지 못한 면을 보고 실망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럽 도시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소소하면서도, 매력적인 면이 분명 있는 도시들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어릴 적부터 소박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도시와 시골이 묘하게 공존하는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런 경험이 자신에게 회색빛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공간적 감수성을 키우게 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건축을 전공한 후에도 대부분 관심을 주지 않는 도시와 건축물에 관심이 많았다.
책에선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폴란드 그단스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네덜란드 힐베르쉼, 라트비아 리가, 크로아티아 리예카, 프랑스 릴-메트로폴 등을 여행하며 저자가 접한 건축물들을 살펴본다. 1부 '소설이 된 도시'에선 파괴와 복원의 역사를 모두 품고 있는 브라티슬라바, 그단스크를 다룬다. 2부 '안목과 애정이 깃들면'에는 건축가나 역사 속 건축 사조가 만들어낸 매력적인 공간을 소개한다. 3부 '비로소 열린 내일'에선 산업혁명으로 번성했으나 쇠퇴한 도시가 되어버린 리예카와 릴-메트로폴을 만나본다. 그는 이 도시들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모습을 발견한다.
저자는 '슬로베니아의 가우디' 요제 플레츠니크, 힐베르쉼에 평생을 바친 빌럼 마리누스 두독을 소개한다. 리예카의 여성 건축가 나다 실로비치와 아다펠리체 로시치,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경계를 오간 릴-메트로폴의 로베르 말레 스테뱅스까지 건축가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가진 문화적 감수성, 예술적 상상력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건 슬로베니아 건축가 요제 플레츠니크에 대한 이야기다.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는 플레츠니크가 남긴 다양한 건축을 만날 수 있다. 두 차례 있었던 세계대전 사이에 활동한 그는 류블랴나를 전쟁으로 고통받은 슬로베니아인들을 모으는 구심점이자 '지중해의 신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류블랴나의 중심 광장인 프레셰렌 재정비와 삼중교 프로젝트에선 이러한 그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슬로베니아 국립 대학 도서관 프로젝트에선 대지진으로 파괴된 건축물의 잔해를 활용해, 도서관 건물 외관에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돌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그는 건축물 구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구도심 언덕 위를 지키고 있는 류블랴나 성을 아크로폴리스로 삼고, 성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강, 다리, 광장, 운하 등을 배치한 도시 계획안을 구상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2004년부터 하나씩 적용됐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2016년 류블랴나는 '유럽 녹색 수도'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자는 "류블랴나에 진심이던 건축가는 비록 유한한 삶을 살고 떠났지만, 그가 사랑으로 남긴 계획은 시간을 초월해 공간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작지만 비범함을 품고 있는 도시와 그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책에서 소개한 힐베르쉼은 20세기 세계 건축을 이끈 네덜란드 전위 건축의 발생지였다. 당대의 혁신적인 건물인 '햇빛요양원'이 있는 곳도 이곳이다. 결핵 환자를 위해 지어진 이곳은 치료제의 발명과 함께 내버려졌다. 이후 1960년대 건축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재조명받게 되고, 리모델링을 거쳐 재활원과 사무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재건 작업에 관한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성 캐서린 성당은 고문헌과 그림을 뒤져가며 완벽하게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방식이 아닌, 최대한 남은 구조를 활용해 공간을 살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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