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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봄편지] 내가 먼저 봄일 때 그대란 꽃이 핀다

2023-01-27

백운산 토끼재 아래 둥지 트니
이 악물고 피어난 섬진강 매화
동토의 선인들 떠오르게 하네
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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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지리산 첫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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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시인

어느새 지리산 품에 안긴 지 25년 되었다. 그동안 철새처럼 8채의 빈집을 떠돌다가 섬진강 건너 백운산 토끼재 아래 새 둥지를 틀었으니 잠시 '텃새'가 되었다. 큰 산의 품속에서는 오히려 큰 산이 잘 보이지 않는 법, 참 오랫동안 강 건너 백운산을 바라보다 이제는 온종일 지리산을 바라보며 산다. 섬진마을과 매화마을 근처, 봄이 오는 길목에 터를 잡았으니 지리산 공부의 새 방책을 마련한 셈이다.

올해도 한겨울의 매화, 말 그대로 설중매(雪中梅)가 피었다. 폭설주의보·한파특보가 내려도 '섬진강 첫 매화'는 당당하게 꽃을 피웠다. 예년에는 동짓날이나 성탄절 무렵에 몇 송이 환한 선물을 주었는데, 지난해 12월13일에 첫 꽃망울을 터트렸으니 겨울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열흘 먼저 봄꽃을 보여준 것이다. 내심 반가우면서도 행여 다 얼어버릴까 봐 남몰래 노심초사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 집에서 십 리 거리인 전남 광양시 다압면의 '소학정 백매'를 보러 갔다. 바로 아랫마을 할머니 댁의 홍매도 때를 맞춰 화답했다. 코로나에 이어 춥고 배고픈 시절에 더 일찍 피어난 '매화 보살'이 문득 "봐라 꽃이다"란 화두를 던졌다. 이렇게 한겨울 추위 속에 기어이 환한 봄기운을 내보이는데, 나는야 지리산 입산 25년이 지나도록 다 알아듣지 못해 언 발을 동동 굴리는 누추한 행색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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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야삼경 별폭포로 변하는 수락 폭포의 고혹한 자태.

깊은 산중의 폭포가 얼면서도 흐르듯이, 추울수록 이 악물고 저 먼저 피어난 섬진강 첫 매화는 피다가 얼다가 다시 피면서 남도의 봄을 앞당기고 있다. 1월 말에 소학정 백매가 지니 우리 집 토종매화가 곧바로 이어받고, 또 한 달 지나 2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과수원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해 3월 초순이면 마침내 매화 축제가 열릴 것이다.

자세히 둘러보면 어디 매화뿐이랴. 양지바른 곳엔 아기 손톱보다 작은 봄까치꽃과 별꽃, 분홍빛의 광대나물꽃이 피어나고, 이에 화답하듯이 그 깊은 산골에는 얼음새꽃(복수초)이 황금 술잔을 내밀며 꽃을 피우고,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등이 낙엽 아래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아직은 한겨울의 이 여린 꽃들이 마침내 동장군을 물리치는 '봄의 선발대'가 아닌가. 이제 머지않아 남해에서 매화향을 맡은 황어 떼들이 섬진강을 따라 북상할 것이다.

그 춥다는 소한·대한도 지나고 이제 곧 입춘이니 이미 가까이 다가온 봄기운을 어찌 막으랴. 소학정 매화나무 아래 숨어서 오래 기다리고 또 기다리니 동박새 두 마리가 날아왔다. 이따금 딱새와 박새, 쇠딱따구리, 직박구리도 찾아왔다. 나는 갈수록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는데 마치 벌새처럼 꽃잎보다 더 가벼운 동박새의 몸짓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 작은 동박새가 뭐라고, 뭐라고 재잘거리는데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봄이 와, 봄이 온다니께"라며 주문을 외는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동박새는 너무나 예뻤다.

사실 나는 동박새를 잘 모르고 자랐다. 백두대간 남쪽의 중심부 바로 아랫마을, 경북 내륙 최북단의 문경시 마성면 하내리 출신이니 어린 시절에는 아예 볼 수조차 없는 새였다. 내가 동박새를 처음 자세히 본 곳은 보길도였다. 아주 오래전 '섬 전문가'인 후배 강제윤 시인의 '동천다려', 그 아름다운 찻집에 머물 때였다. 윤선도의 세연정과 내밀하게 연결돼 있으니 수시로 도둑고양이처럼 들락거리며 한겨울 동백꽃과 동박새를 지켜보았다. 지리산에서 자주 보길도를 들락거리던 그 무렵에 '동백꽃을 줍다'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삶이 늘 그렇듯이 갈 수 있을 때 가고, 볼 수 있을 때 보아야 한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묘비명처럼 한순간에 다 놓치게 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한 계절 미리 사는 지혜는 꼭 필요하다. 가을 나무가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채 정면의 알몸으로 겨울을 견디고, 가을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고 산촌 농부가 장작을 준비하듯이 계절을 미리 살아보는 것이다. 겨울에 미리 봄을 살고, 봄에 미리 여름을 살고, 여름에 미리 가을을 사는 것은 그 얼마나 여유로우며 고수다운 품새인가.

그리하여 "매화는 일생토록 제아무리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은 여전히 절창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들이 그러했듯이 동토의 시대에 먼저 온몸 꽃피우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꼿꼿한 정신의 골격은 여전히 꽃샘추위 북서풍이요, 생명의 온기는 동남풍이다. 벚꽃이 피어야 봄이 온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늦었다. 내가 먼저 봄일 때 마침내 그대라는 꽃이 피는 법이다.

올봄에도 늘 그 자리에서 전남 장성 백양사의 350세 고불매는 연분홍 매화 1만3천200송이를 피울 것이고, 안동 용계리의 700세 은행나무는 무려 9만3천800장의 새잎을 내밀 것이다.

글·사진=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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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 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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