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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생가 육우당의 본래 모습. 안동댐 수몰로 안동시 태화동으로 옮겨졌다. |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언젠가 '대구경북의 보수성'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나는 나라의 환란 때마다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곳도 대구경북인 것을 예로 들었다. 그것이 보수의 바탕이며, 도의와 애국 그리고 정의가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시인 이육사를 들었다.
안동서 태어난 퇴계 이황의 14세손
日 유학시절 흑우회 회원으로 활동
이후 베이징 건너가 비밀결사 참여
대구 배일격문사건으로 옥고 치러
조선일보 대구지국서 기자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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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세손으로 1904년 안동 도산면 원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부 이중직은 진보적 관리로 민족교육에 힘을 썼고, 외가는 독립의병 총사령관 허위의 집안이다. 여섯 형제(원기·원록·원일·원조·원창·원홍) 중 둘째로 친가와 외가, 그리고 형제 모두 항일투쟁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중에 원록(육사)은 시인, 원일은 서화가, 원조는 문학평론가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다. 1947년 원조는 월북했다.
형제들은 어린 시절 조부에게 소학 등 한학을 배우다가 보문의숙에서 수학했다. 육사는 16세 때인 1920년 안일양과 결혼했다. 조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 모두 대구부 남산정(현재 대구 중구 남산동 662번지, 남산포레스트 아파트)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때 서화의 대가 석재 서병오에게 사사했고, 약령시에서 한약 관련 공부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함께 수학한 동생 원일은 이후 일가를 이룬 서화가가 되었다.
육사는 1922년 영천의 백학학원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한 뒤, 1924년 도쿄로 가 킨죠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한다. 그 또한 당시 많은 지식층 청년들처럼 사회주의 사상의 지류인 아나키즘을 접하고 박열, 이경순, 장상중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모임인 '흑우회'에 가입한다. 1926년 육사는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에 참여하기 위해 이정기와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 상학과에 입학하고, 아나키즘 독립운동단체인 다물단의 남형우와 배천택, 의열단의 김창숙 등을 만나 김원홍이 이끈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하고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1927년 대구로 돌아온 육사는 10월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현재 대구 지하철 1호선 4번 출구와 전 하나은행 본점 주변)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그때 육사의 여섯 형제 모두 검거되었으나 나이가 어렸던 원창, 원홍 두 동생만 불구속되고 형 원기, 동생 원조와 함께 대구형무소(현 대구 삼덕교회 자리)에 투옥된다.
이때부터 수인번호 '264'를 따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육사(李肉瀉, 李戮史, 李陸史), 이활(李活) 등의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육사의 길지 않은 생애에 일제에 의해 17회 투옥되는데 그 시작이 대구가 된 셈이다. 1929년 장진홍 의사가 체포되면서 풀려나 1930년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그해 중외일보에 대구 기자로 임용되지만, 크고 작은 일로 투옥되고 풀려나기를 거듭하다가 1931년 대구 배일격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그해 3월 석방된 후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기는데, 이것은 형은 인천지국에 동생 원조는 본사 문화예술부 기자로 삼 형제가 같은 신문사에 근무한 희귀한 경력이다. 기자 신분으로 만주를 드나들며 최초의 일본어 소설 '아귀도'를 쓴 장혁주를 문단에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 육사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나온다. 1932년 베이징과 톈진을 거쳐 난징으로 가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학해 군사간부 교육을 받는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 탄약, 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 변장법, 무기 운반법 등을 배우고 뛰어난 권총 사격술을 연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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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는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예견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자 식민 치하의 암울한 사회를 매섭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적을 향해 즉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투사였다. 이러한 그의 염결성은 중국 공산당과 손잡은 김원봉을 수용하지 못해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고, 1934년 경기도 경찰부에 의해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함께 구속된 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의 변절을 혹독하게 꾸짖은 것(장인에게 '그 더러운 피가 흐르는 딸(아내 안일양)을 데려가라'는 장문의 편지를 보냄)에서도 드러난다.
1934년 일제 경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기소유예로 석방된다. 당시 일제가 작성한 '이원록(육사) 소행조서'를 보면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이라 씌어 있다.
석방된 후 시사평론 집필을 다시 시작하고 한문학자 정인보, 신석초 시인을 만나 친교하면서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 간행에 참여하고, '신조선' 편집과 더불어 상하이에서 만난 루쉰(魯迅)의 소설도 번역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져 요양하는 일이 잦아진다. 포항에 소재한 동해송도원과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의 휴양으로, 시사에서 문학으로 글쓰기의 영역이 넓어지는데, 이 시기에도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고 그에 대한 일제의 감시도 치열했다.
1941년 2월 딸 옥비(沃非)가 태어났다. 아들 동윤을 어려서 잃은 터라 외동딸이어서 더욱더 애지중지하였다. 서울 종암동으로 이사를 하고 폐 질환으로 경주 기계와 옥룡암 등지에서 요양했다. 사촌 형 이종형이 있던 포항 청림동으로 요양 갔을 때, 60만평 크기의 청포도 농장(현재 해군 훈련장)을 보고 지은 시 '청포도'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1943년 4월 일제의 패망을 예감한 육사는 베이징으로 가 충칭, 옌안을 거치면서 결전을 위한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늦가을에 붙잡혀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내의 동창후뚱(東昌胡同·명대 환관들의 정보기관이 있던 곳)으로 압송, 구금되었다.
1944년 1월16일 새벽, 결국 그곳에서 일제의 참혹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독립군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시신을 거둬 화장하여 동생 원창에게 전했다. 육사의 유골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고향 뒷산으로 이장되었고, 2004년 안동시에서 이육사문학관을 건립하고 생가를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동생 원조가 육사가 남긴 유시(遺詩) '꽃'과 '광야(曠野)'를 소개하며 '눈물을 뿌리며 썼다'라는 짤막하게 쓴 후기는 다음과 같다. '가형(家兄)이 41세를 일기로 베이징 감옥에서 영면하니 이 두 편의 시는 미발표 유고(遺稿)가 되고 말았다. 이 시의 공졸(工拙)은 내가 말할 바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지원극통(至寃極痛)을 품을 따름이다. -1945년 11월18일, 사제(舍弟) 원조방루(源朝放漏) 근기(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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