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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동해안의 반촌마을, 동해안 7번 국도 빛내는 오백년 세거지…대학자·명장 줄줄이 배출 '작은 안동'

2023-02-03

괴시리·원구리·인양리 반촌
안동 김씨 문장가 등 귀양지
동학교도 600명도 영해 모여
종가 고을 조성…재실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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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창수면 인량리 갈암종택. 영남 산림으로 이조판서에 오른 재령이씨 갈암 이현일 종택이다. 〈영덕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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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기성면 사동리의 평해황씨 해월종택. 선조 때 길주목사를 지낸 해월 황여일의 종택이다. 〈국학진흥원 제공〉

조선시대 양반은 바닷가를 '갯가'라 하여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해안 영해는 달랐다. 해안 고을이지만 학문을 숭상하고 문풍이 넘쳐 안동 사족과 혼반을 맺고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와 '작은 안동'이라 불렀다.

지금은 영덕군에 속해있는 소읍이지만 옛날에는 강릉과 경주 사이 가장 큰 고을로 부사가 고을을 다스렸고 '예주'라 불렀다. 안동에서 반변천을 따라 임하·진보를 거쳐 창수령을 넘는 영해 길은 골짜기마다 고택과 재실이 연이었고 문향(文香)이 송홧가루처럼 날렸다. 세거 역사가 오백 년이 넘는 괴시리·원구리·인량리 반촌마을과 무안박씨 청신재 종택·평해황씨 해월 종택이 오늘날에도 동해안 7번 국도를 빛내고 있다.

◆영해를 거쳐 간 역사적 인물

영해 문풍은 여말에서 시작됐다.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의 수제자, 역동 우탁이 영해에서 관리 생활을 시작했고, 불교를 비판한 성리학자 담암 백문보가 외가인 이곳으로 낙향했으며 대학자 목은 이색이 태어났다. 조선 초에는 사림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이 영해부사를 지냈다.

기라성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영해로 귀양 왔다. 여말의 권근을 시작으로 광해군 때 안동김씨 문장가 하담 김시양, 대구서씨 중흥조 약봉 서성, 숙종 때 국문학의 큰 인물 서포만필의 김만중, 청구영언의 김춘택, 기호남인 정승 석담 권대운, 실학 4대가 척재 이서구가 귀양살이했고, 명필판서 휴곡 오시복은 영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학혁명의 시발도 영해이다. 1871년 3월 최제우 교주의 순교 7주기를 맞이하여 동학교도 600여 명이 영해에 모였다. 최시형과 이필재의 주도로 교조신원과 탐관오리 척결을 내걸며 천제를 지내고 관아로 몰려가 영해부사를 처단했다. 고종실록에 '영해부에 도적 무리 수백 명이 밤중에 들이닥쳐 부사를 죽이고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빼앗아 갔으니 토벌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이 사건으로 동학교도 100여 명이 처형당했는데, 영해동학혁명은 갑오동학혁명보다 23년 빠르다.

◆축산 청신재 박의장종택

북상하는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면 영덕 축산에서 무안박씨 청신재 박의장 종택을 만난다. 박의장은 임란의 명장이다.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에게 빼앗긴 경주성을, 경상좌병사 박진과 함께 화포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5개월 만에 탈환했고 7년간 경주부윤으로 있으면서 대구 영천 경주 울산 등지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5품 판관에서 종2품 가선대부까지 올랐다. 임란 후에는 삼도 병사와 수사(수군절도사)를 맡아 나라를 지키다가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명군 장수 양소조가 선조에게 박의장을 칭찬하는 이야기가 실록에 나오고 무의는 시호이다.

종택은 아들 박선이 1644년에 지었다. 영남종가의 견본 같은 모습이다. 대문채에 들어서면 중문 너머 □자형의 본채, 높낮이 있는 건물의 배치, 사랑채의 위엄, 너른 바깥마당과 안마당의 조화, 독립 공간을 가진 불천위사당과 내삼문, 번잡하지 않고 고졸한 품격이 있다. 청신재는 퇴계제자 김언기에게 학문을 배웠고 아들 박선은 여헌 장현광의 제자로 서애 손녀와 혼인을 맺었으니 그 옛날부터 안동사족과 세교를 다졌다.

◆영해 괴시리 전통마을

영해면소재지 동북에 자리 잡은 괴시리는 영양남씨 400년 세거지로 30여 고택이 즐비하다. 괴시리의 괴(槐)는 학문의 나무·회화나무를 뜻한다. 부산 괴정동도 마찬가지다. 선비고을에 많이 심었다. 중국의 고도 시안과 산시 평요고성의 가로수는 전부 회화나무이다.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이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다. 마을 생가터에 목은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목은은 영해를 소재로 20여 수의 시를 남겼다.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고 영해는 나의 외가'라 하여 관어대소부를 지었다.

점필재 김종직이 성종 때 영해부사로 부임하여 목은 생가에서 목은을 그리며 지은 시이다. "선생의 연원이 앞뒤로 빼어나/ 나라 인물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제 선생이 태어난 곳을 부질없이 들르니/ 시대가 달라 모시지 못한 게 한이로다." 이처럼 동해 외진마을 괴시리에서 우리 역사의 큰 인물 두 사람이 글 속에서 조우했다.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고 영양남씨 괴시리종택, 대남댁, 영은고택, 물소와고택, 임천정, 괴정 등 문화재가 16점 있어 전국 으뜸의 해안 반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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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 현판. 영해 난고종택 사랑채 현판으로 택리지 이중환의 아버지 성재 이진휴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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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 현판. 원구리 경수당 종택의 현판으로 퇴계 글씨이다.

◆영해 원구리 반촌마을

영해에서 창수령 방향으로 4㎞ 가면 원구리 반촌마을이 나온다. 영양남씨·무안박씨·대흥백씨, 이 세 집안의 오백 년 세거지다. 한때 마을에 서원이 세 개가 있을 정도로 문풍이 강했다. 박의장·홍장 형제를 배향하는 구봉서원이 복원됐다. 임란 때 세 집안의 종손이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해 선무공신이 됐다. 남의록과 남경훈 부자, 박세순, 백충언과 백사언이 그들이다.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천·팔공산·화왕산에서 왜적과 싸웠다.

세 집안의 고풍스러운 고가, 영양남씨 난고종택, 무안박씨 경수당종택, 대흥백씨 상의당이 모두 문화재이다. 대흥백씨는 이곳으로 낙향한 담암 백문보 후손이다. 담암은 숭불의 폐단을 비판했지만 동시대 고승 나옹화상이 여기서 태어났다. 상의당 추녀는 승무 춤사위 같고 고깔모자 형상이다. 경수당종택은 한때 99칸 대저택으로 박의장의 숙부 박세순이 지었고 현판은 퇴계가 썼다. 경수당(慶壽堂)은 '경사가 많은 집안으로 천수를 누린다'로 풀이한다.

난고종택의 주인은 의병장 난고 남경훈이다. 증손 남노명·구명 형제가 숙종 때 나란히 대과에 급제하여 영남유림에 이름을 떨쳤다. 남노명은 거창군수를 마치고 낙향하여 난고종택 사랑채 만취헌을 지었다. 만취(晩翠)는 소학의 구절로 '늦게까지 푸르다' 의미이다. 현판은 택리지 이중환의 아버지 성재 이진휴가 썼다. 남구명은 순천부사 시절 치적을 베풀어 순천을 빛낸 역사적 인물로 선정됐고, 후손은 경주 보문에 세거하여 보문남씨라 불렀다. 진평왕릉 옆 마을이다.

또 광해군의 계축옥사에 연루돼 11년 귀양살이한 대구서씨 약봉가의 개산조, 약봉 서성이 원구에서 귀양 살았다. 원구는 선비 쉼터인 정자가 5개나 숨어있고 곡강고택 등 고풍스러운 고가가 숨바꼭질하듯 나타나는 보석 같은 마을이다.

◆팔성종택마을 인량리

원구에서 북쪽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면 창수면 인량리가 나온다. '나라골'이라 부르고 어진 인물이 많이 나와 인량이다. 영해읍지에 팔성종택 마을, 여덟성씨 집안의 종가가 있던 마을이라 하니 대단한 길지이다. 광해군 때 이미 향약을 만들었고, 재령이씨·안동권씨를 비롯한 몇몇 집안 종가가 아직 남아있다.

재령이씨 종택은 임란 전후에 지은 마을 안쪽의 충효당종택이다. 영남사족은 충효를 유난히 숭상했으므로 당호가 충효당인 영남고택이 8개나 있다. 의령현감을 지낸 이함은 종택에 만권서루(萬卷書樓)를 만들었다. 만권의 책은 학문의 별, 문창성이 이를 비춘다고 해서 대단하게 여겼고 수십 마지기 문중 전답에 닥나무를 심어 한지를 생산했다. 이함의 손자가 영남 산림으로 이조판서에 오른 갈암 이현일이고 이곳 충효당에서 태어났다. 갈암은 청신재 박의장 집안과 가깝게 지냈고 청신재 손녀와 결혼했다. 진보의 갈암종택이 임하댐으로 수몰되자 이곳으로 옮겼다. 이웃 우계종택은 갈암의 백부 이시형 종택이다.

안동권씨 영해문중은 세조 때 예조판서 권자신이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멸문당하고 13세 어린 조카 권책이 영해로 유배 오면서 시작됐다. 권책은 문종의 비 현덕왕후가 당고모이고 단종과 재외종간이다. 이곳 오봉종택의 주인이다. 종택 내 오봉헌과 벽산정이 고색창연하다. 뒷산에 커다란 왕바위와 주변에 엎드린 모습의 작은 바위 여섯이 있는데 사육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웃 강파헌과 지족당은 대과 급제한 후손이 벼슬살이를 마치고 낙향하여 지은 고택이다.

용암종택은 선산김씨 용암 김석중이 건립한 천석꾼 종택이고, 삼벽당은 예안의 농암 이현보 아들, 영천이씨 이중량의 종택이다. 처인당은 영양남씨 종택이고 만괴헌은 평산신씨 종택이다. 종가 고을이니 재실도 많아 가까이 있는 안동권씨 옥천재사와 무안박씨 희암재사가 국가민속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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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귀헌 현판. 울진 해월종택 별채 현판으로 한석봉 글씨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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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헌 현판. 울진 해월종택 별채 현판으로 아계 이산해가 썼다.

◆평해황씨 해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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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울진 월송정과 망양정 사이에 있는 해월종택은 선조 때 길주목사를 지낸 해월 황여일의 종택이다. 임란 때 권율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정응태 무고사건 때 이항복·이정구와 함께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서 변무사건을 해결했다. 정사 이항복은 사행기 조천록에서 해월을 칭찬했다. 학봉 김성일의 질녀와 혼인했고 대대로 안동사족과 혼반을 맺었다.

종택 별채인 해월헌의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 이산해가 평해로 귀양을 와서 썼다. 해월헌기에 '군자의 마음은 광대 고명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이라 새겼다. 해월이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귀향하면서 풍진 세상을 떠돌다가 이제야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만귀헌(晩歸軒) 현판을 추가했다.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전한다.

해월 10세손이 애국지사 국오 황만영이다. 혼반을 맺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1912년 만주로 망명해 서간도 신흥학교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상해 임정에서 활약했다.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이렇듯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아침이슬처럼 사라진 서울의 경화사족과 달리 수백 년을 굳건히 이어온 영남종택은 조선의 얼굴이다. 문중은 한번 해체되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 어렵고 전통문화의 큰 획이니 미래 세대를 위하여 소중히 지켜야 할 역사의 자산이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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