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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의 소소한 패션 히스토리] 그런지 룩(Grunge look)…비싸게 팔리는 구제 청바지·스니커스…'낡은 것'에 대한 새로운 가치 부여

2023-02-17

찢기고 구멍 나고 너덜너덜한 패션 스타일
90년대 청춘 X세대, 록 감성 반항 이미지
디자이너에게 큰 영감…고급 패션 등장
명품브랜드 '도' 넘은 마케팅 논란 일기도
빈티지 감성…지속 가능한 패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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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티셔츠를 선보인 2010 SS 발만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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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옷장에 가득 차 있는 옷이지만 새로운 계절이 되면 늘 새 옷을 입고 싶어진다. 그리고 옷이나 가방을 구입할 때 깨끗한 '새것'의 상품을 보고, 때에 따라 어디 미세한 오염 물질이나 잘못된 곳이 없는지 잘 살펴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빈티지, 구제 패션이 인기이다.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패션'에서 바라는 것은 단순히 '새 상품'이 아닌 '새로운 감성' '남다른 멋'일 것이다. 찢어진 청바지, 구멍이 난 티셔츠, 낡은 듯한 스니커스 그리고 넓은 어깨의 90년대 빈티지 재킷, 한때 촌스럽다고 여겼던 할머니 스웨터 패션은 인기 패션 제품이 되었다. 이러한 패션은 명품 패션 브랜드나 앞선 유행성의 브랜드에서 찢기고, 올이 풀리고, 구멍 난 그리고 조각난 천으로 만들어진 티셔츠, 바지, 재킷 등으로 지난 십수 년 동안 멋진 스타일로 소개되고 있다.

반듯하지 않은, 낡은 이미지의 패션 스타일을 '그런지 룩(Grunge look)'이라 한다. 이는 1990년대 대두되었던 것으로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늘어진 티셔츠,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청바지 따위로 지저분하고 거친 느낌을 주는 옷이나 옷차림'으로 정의되고 있다. 1980년대 경제 급성장에 대한 부작용으로 사회는 시간에 얽매이는 기계적인 라이프 스타일, 인간의 가치가 돈·직업·재산으로 정의되는 자본주의적 삶 그리고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시적으로 꾸미는 상업적 유행이 번지게 되었다. 80년대 패션을 되돌아보면 넓은 어깨 패드를 넣은 코트, 화려하고 밝은 컬러, 광택 소재 등 급성장하는 자본주의의 상업화의 집약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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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그런지 패션의 너바나. 〈pixels,com〉

80년대 후반, 90년대 젊은 층이었던 X세대는 이에 대한 불만과 기성세대의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감성은 당시 언더그라운드 장르였던 그런지 록의 감성과 통하게 되어 패션에서 편하면서도 반항적 이미지를 표출할 수 있는 그런지 룩으로 나타났다.

그런지는 패션으로 더욱 유명하고 현재는 주류이지만, 그 기원은 반문화적 음악이다. 80년대 초 미국에서 펑크와 메탈 음악을 혼합한 그런지 록(grunge rock) 밴드들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80년대 고도의 기술로 제조된 대중적 팝 음악과 달리 어두운 주제와 다소 왜곡된 녹음과 강렬한 음악 구성을 추구하였다. 이후 스크리밍 트리스(Screaming Trees·직역하면 '비명, 괴성 지르는 나무들') 그리고 국내에서도 유명한 너바나(Nirvana) 등의 그런지 록 밴드들이 생겨났다. 이들 음악은 모호한 개인적 감정이 분출되는 가사와 폭발적인 사운드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사회적으로 대세가 된 기성세대의 가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젊은 층의 감성과 통하게 되었다. 그런지 록은 음악 장르로서 성공하였고 너바나, 펄 잼 등 그런지 록 밴드도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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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출시된 발렌시아가 스니커스.

이와 같이 그런지 패션은 80~90년대 주류가 된 자본주의 유물론적 가치에 반항하는 욕구가 분출된 것이고, 패션이라는 자아표현의 도구를 통해 개성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당시 자유롭고 반항적 이미지의 그런지 록 밴드가 착용했던 찢어지고 낡은 청바지와 운동화, 더러워진 플란넬 셔츠, 늘어진 티셔츠, 헐렁한 낡은 스웨터 등은 80년대 후반·90년대 젊은 층이 수용하면서 대표적인 패션 스타일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마크 제이콥스, 안나 수이 등과 같은 패션 디자이너에게 큰 영감을 주어 세계 패션 컬렉션에 고급 패션으로 등장하였고, 60~70년대 히피와 70년대 후반 펑크처럼 점차 그런지 룩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는 사라지고 상업적인 패션 모티브로 재탄생하였다. 몸에 잘 맞는 실루엣, 단정하고 깨끗한, 타인에게 잘 보이고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옷차림과 대비적으로 그런지 룩의 대표적인 특성인 구멍이 나거나 찢어진 티셔츠와 바지, 올 풀림, 너바나 등 그런지 록 밴드 이미지의 그래픽 등이 세련된 패션 스타일로 재해석되어 있다. 그런지 패션 본연의 의미는 사라졌지만, 반항적 이미지와 거칠고 자유로운 감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유명 패션 브랜드들에서 꾸준히 그런지 패션은 세련된 스타일로 소개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논란이 되기도 한다. 2010년 프랑스 패션 브랜드 발만의 수십 개의 작은 구멍이 난 티셔츠, 이탈리아 브랜드인 골든구스의 때 타고 낡은 듯한 스니커스, 그리고 2022년 200만원이 넘는 가격으로 출시된 폐기처분 직전으로 보이는 발렌시아가 스니커스. 이들은 출시될 때마다 당황스러움과 명품 브랜드의 도 넘은 마케팅이라는 논란을 일으켰지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이제 '새것'에 대한 개념과 가치를 달리해야 하는 이 시대에서 사회적 화두를 던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지 패션이 원래 지닌 반자본주의적·반소비적 의미는 사라졌지만, 30여 년이 지난 현재 낡은 구제 패션에 부여되는 새로운 감성 그리고 주요 패션 과제인 지속가능성의 가치로 재탄생되었다. '신상'이 아닌 '진짜 낡은 것'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허용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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