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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의 클래식 오딧세이] 20세기 음악의 배경, 세기말 빈 ①…'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2023-03-24
분리파전시관
분리파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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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이 세 사람은 20세기 초,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존의 음악 어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제2 빈악파'라고 부른다. 아름다운 선율, 마음을 울리는 감동적인 화성, 장조 혹은 단조와 같은 오랜 질서와 음악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버린 사람들이다.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과거와의 결별'이라는 지점에 서 있다. 그들이 결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1857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요제프 1세는 제국의 중심 도시 빈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을 철거하고 도시를 확장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고 보다 현대적인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새롭게 건설될 이 지역(링 스트라세)에 신 황궁, 극장, 오페라 하우스, 공원 등을 짓기로 했다. 이런 거대한 계획을 가졌던 황제는 당연히 제국의 위상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나 베네치아 등 일부 지역을 잃었고 프로이센과 전쟁에서도 대패했다.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헝가리인들은 독립을 주장했고 결국 황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수립하고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재빠르게 권력의 이동을 위해 움직인 사람들이 부르주아 시민계급이다. 거대한 자본의 힘을 가진 이들은 약해진 황제의 권위를 지켜주는 척하면서 도시를 장악했고 황제의 도시 개발 주도권은 이들에게 넘어갔다. 팍스 리베랄(Pax Liberalis.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평화)를 도시 개발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지만 그들이 추구한 평화는 더 잔인한 사회 문제를 낳았다.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황제는 처음부터 링 스트라세 주변에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부동산 투기를 할 수 있게 허락했다. 애초에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을 위한 공공시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탓에 서민들의 거주지는 점점 소외되었다. 이 지역은 사설 건설회사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건설회사들의 횡포에 서민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났다.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했던 도시 빈은 유럽 최악의 빈민가를 형성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는 쌓여가고 있었다. 도시 서민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고 합스부르크 식민지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매우 사소한 사건 하나가 국가 간, 민족 간의 갈등을 일으킨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빈의 권력자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화려한 유흥의 세계가 제공하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있었다. 계속해서 부를 축적했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출생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 즉 자본의 힘으로도 결코 귀족과 같은 품위를 가질 수 없었던 '교양'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자유 시민 엘리트들을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세웠고 박물관, 극장을 지었다. 귀족 계급의 족보는 얻을 수 없었겠지만, 정신적인 귀족으로 거듭나는 길은 학문과 예술, 문화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교양과 문화는 귀족 행세에 지나지 않은 저급함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현상을 가장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이들이 바로 그들의 아들들이다. 1850~1870년대 출생의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아버지들 세대의 모순과 위선의 실체를 바라보며 문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이 결별하고자 했던 '과거'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1873년의 경제공황은 자유주의 시민들에게 무능함을 느끼게 했고 그럼에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행태를 보며 그 아들 세대는 좌절과 자기 의심을 동반한 비판을 쏟아냈다. 과연 자유주의에 의한 평화, 군대와 같은 전통적인 권력의 지배가 아닌 법률과 합리적 사고를 통한 사회적 통합을 말하는 자유주의 신인류는 무엇인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0년대가 되면서 예술과 건축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과거에 대한 반란, 과거와의 결별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빈의 대표적인 예술인협회 안에서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학계를 비판하고 회화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지지하는 예술가들이 나타났다. 젊은 예술가들은 '현대 인간의 진짜 얼굴'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리고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예술인협회의 일부 회원들과 함께 '분리파'를 결성했다. 빈의 아르누보 운동이 본격적으로 그 시작을 알린 것이다.

이들은 곧 분리파 전시관을 세웠고 전시관 현관 위에는 그들의 선언문이 적혀 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바이올리니스트, 다원예술그룹 ONENES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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