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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정 (대구YWCA 사무총장) |
'반지길'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름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탐방로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반지 모양의 둥근 길로 근대기의 대구지역에서 거주하며 시대를 바꾸었던 여성들의 삶을 마주하게 되는 탐방로이다.
길의 시작은 현재 의료선교박물관이 있는 '동산'이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 여성은 여성과 아이들을 사랑한 선교사인 마르다 스위처(1880~1929),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계명대 창설자(안두화)의 어머니 넬리 딕(1866~1909), 최초의 구세군 여성 선교사로 장티푸스 환자를 위해 열정적으로 봉사하다가 결국 감염되어 삶을 마감한 마그다 콜러(1887~1913), 작가이자 교육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헬렌 켈러(1880~1968)이다.
'3·1만세운동길'에서는 꽃다운 나이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한 이선애(이선희·1896~1926)는 신명여학교 졸업생으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한국YWCA의 연합위원으로도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옛 제일교회'에서 만나는 브루엔(1875~1930)은 대구 최초의 여자학교인 신명여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또한 추애경(1900~1973)은 신명여학교 졸업생으로 영남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이다. 대구의 3·8 만세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던 그는 1927년, 대구YWCA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당시 신명여학교를 중심으로 한 기독학생운동과 부녀자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약전골목'에서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여성 개업의인 김선인(1909~1968)을 만나게 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병원을 무료 산원으로 개방하는 등 여성 환자 치료와 보건의식 교육에 앞장선 인물이다. 다음은 소설가 김원일이 1954년 대구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소설의 장소 '마당 깊은 집'이다. 이곳에서는 전쟁 직후 자식들과 살아남아야 했던 어머니들의 고단하지만 억척스러웠던 삶을 만나게 된다.
'종로'에서는 기생에서 민족주의자, 여성운동가로 거듭났지만 월북으로 인해 존재가 희미해진 정칠성(1897~1958), 조선 최초 단발 기생으로 항일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한 강향란, 독립운동가이자 육영사업가였던 염농산(1860~1947), 대구 최초의 초등학교인 희도국민학교를 세운 육영사업가이자 사회사업가였던 김울산(1858~1944)을 만나게 된다.
'진골목'에서는 전 재산을 내놓으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열었던 남일동 7명의 여성리더십을 만나게 된다. '염매시장'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의 하나로 조선 후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이 생계를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이상정 고택'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이자 이상화 시인의 형인 이상정 장군의 부인인 권기옥(1901~1988)과 민간여성비행사 1호인 박경원(1897~1933)을 만나게 된다. '계산성당'에서는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로 '끼니는 굶어도 정신은 꼿꼿해야 한다'고 믿었던 서중하(1882~1955), 종군기자이자 소설가이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장덕조(1914~2003),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통해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여성들의 욕망을 첨예하게 다루었던, 신문 기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1923~2017)을 마주하게 된다.
햇살이 따스해지면서 꽃망울이 터트려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대구를 움직인 여성들의 발자취인 '반지길'을 걸으며 암울했던 근대사에서 나비효과를 일으켰던 여성들의 삶을 마주해 보길 추천한다.
최윤정 (대구YW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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