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30801010000033

영남일보TV

[자유성] 조선시대 전월세

2023-08-02

부동산의 부침이 극심해지면서 근년 들어 전월세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다. 특히 한국의 독특한 전세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받은 전세 보증금을 은행에 넣어 이자를 챙기거나 재투자하는 재산증식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사실상 집을 담보로 하는 사금융과 다름없다. 역으로 별도 임대료 부담이 없는 세입자는 기간 만료와 함께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내 집 마련의 발판으로 삼았다. 통계청이 2021년 발표한 ‘2020 인구주택 총조사 표본 조사’에서 2020년 11월 기준 전체 가구 중 월세는 478만8천가구(22.9%), 전세는 325만2천가구(15.5%), 무상 거주 78만1천가구(3.7%), 사글세 11만7천가구(0.6%) 순이었다. 우리 국민의 42.7%는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독특한 우리의 전세 역사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중기에 전세 보증금은 노비 4~5명을 살 수 있는 20~60냥이라는 기록이 있다. 전월세의 애환도 발견된다. 벼슬을 위해 한양으로 올라온 퇴계 이황 선생의 문집 속 ‘살구꽃’ 시에는 "한양의 셋집에 동산 뜰이 비었더니 해마다 울긋불긋 온갖 꽃이 피어나네"라는 문구가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셋방살이의 설움을 한시로 표현했다. 점필재 문집에는 "성 중에 있는 몇몇 집들은 다 내가 머물러 살았던 집인데 때로는 몰아 내쫓음을 당하여 동서로 자주 떠돌아다니었네"라는 한탄이 나온다.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의 일기에는 "51세에 지금의 충무로역 근처에 기와집 사랑채를 셋방으로 얻었다"고 적었다. 한양에서 관직으로 근무한 수많은 정승들도 일종의 전월세로 살았음을 암시한다. 백종현 중부지역본부 부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