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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부 최우수상(대구시교육감상) 수상자 이서현(대구 원화중 3년). |
기억나, 내가 처음 이 책을 꺼내들었을 때 말이야. 아무 생각 없이 서점을 거닐다가 너랑 눈이 마주쳐 버렸고 꽃을 든 넌 이상하게도 날 이끌었지. 그 향기에 홀린걸까, 네가 든 꽃은 아마 양귀비였나 보다. 당연하게도 나는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거야.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었지. 네가 가진 꽃에 어떤 가시가 숨겨져 있는지 말야.
어릴 때부터 내 삶은 공부와 함께 보냈다. 이런 저런 학원에 다니며 테스트를 보았고 남들 다 다니는 피아노, 태권도를 하는 대신 오로지 훗날의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다. 힘들었다. 나보다 더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나는 너무 지쳤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매번 답은 똑같았다. "널 사랑하니까, 너 잘되라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모두가 다 똑같은 말을 한다. 나 잘 되라고 공부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안에는 나를 사랑해서란 말이 따라온다. 주마등처럼 학교 관악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었던 때가 스쳐 지나갔다. 아, 별 생각을 다하고 잠시 피곤했나 보다. 그나저나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이젠 공부해야 하는 그 이유마저도 듣기가 질린다. 그렇지만 날 위한다는데, 날 사랑한다는데, 거기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그렇게 나는 나를 공부 속에 던져놓았다. 책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지옥 같은 이곳에서 그나마 현실에 대한 생각을 멎게 했다. 그리고 공부를 위해 나의 작은 바람이나 욕심은 버려두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 같아서 관계나 일상 속에 씌우면 그것들이 한 없이 특별해 보이게 한다. 우리에게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피도 섞이지 않고 아무 접점 없는 남과 만나 평생을 함께 하려고 하는 이유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세상이 알려준 사랑은 이런 반짝거리는 것들 뿐이였다. 운명이 갈라놓은 사랑이야기,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있었을 지라도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세상은 디즈니처럼 마냥 행복한 사랑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처음 사랑의 이면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을 당시엔 항상 보던 달의 모습은 오직 앞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충격과도 같았다. 난 그것을 해주를 만나며 알게 되었다.
해주는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었다. 해록이를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 해록이의 여자친구인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급'이 올라가 보이기 위한 발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해록이는 그런 해주한테 속고 만 것이다. 해주는 사랑을 무기로서 그들의 관계에 씌웠다. 그러니까, 사랑을 관계에 씌우면 특별해 보이는 것이 아닌 왜곡된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말로 모두의 눈을 가리려고 했다. 서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상대방을 마음대로 다스리려고 한다. 명목은 너무도 완벽해 건들 수 없다. '사랑해서', 단지 그 뿐이다. 그 자체로 너무 강력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간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구분조차 못한다. 내가 경찰의 말을 읽기 전까지 해주가 피해자인줄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속절 없이 당하는 해록이가 안쓰럽다가도 바보같기도 했다. 근데 이상하지. 해록이가 누군가와 겹쳐보였다. 도무지 알 수 없어 생각을 거듭하던 중에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서현아, 이제 책 그만 읽고 공부해." 아, 이제 알았다. 그게 나였구나.
중학교 1학년, 봉사시간을 빵빵하게 준다길래 관악부에 들어갔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를 택했고 처음엔 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솔- 소리가 났을 땐, 낮지만 청아하고 깊은 울림에서 오는 왠지 모를 서글픔에 마음이 뺏겨버렸다. 공부할 때와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과 함께 그 어떤 것보다 날 사로잡았고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악기를 분 것, 방과후 연습을 핑계로 관악부 친구들과 시시콜콜하게 논 것, 악기를 불며 서로가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나라는 것 모두 다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공부와 병행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연습했다.
클라리넷의 묘한 서글픈 소리로 연주하다 보면 내 감정이 그 속에 들어가 공부든 다른 것이든 나의 힘든 마음을 녹여줬다. 클라리넷은 음역대가 다양해 튜바처럼 베이스를 맡을 때도 있었고 플롯과 함께 멜로디를 맡았다. 음악이 시작되면 모두가 깨지지 않는 그 흐름 속에 들어가 각자의 선율에 몸을 맡겼다. 모든 것이 좋았다. 내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해 주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관악부에 들어온지도 1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여러 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라 이번엔 춘천관악경연대회에 나간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그 날 가족들에게 공부 말고 클라리넷을 불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난 그러지 못했다. 대회 전 시험성적이 아주 잘 나왔고 엄마, 아빠의 표정은 말도 못하게 기뻐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클라리넷을 한다고 말한다면 무슨 말이 올지는 너무 뻔했기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만 포기하면, 나만 참고 공부한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꾹꾹 눌러두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다 만난 책은 나에게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변해야 한다. 나는 나, 이서현이라는 사람이고 사랑한다고 나를 바꾸려 하면 안 된다. 가족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았기에 난 나란 사람을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랑이다. 해주가 해록이한테 그랬듯이 말이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클라리넷이지 하고 싶지 않은 공부에 혹사되가며 내 꿈이 짓밟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해록이는 저수지로부터 아직도 어디있는지 모르지만 그와 다르게 난 잃어버린 나를 찾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리고 난 오늘, 클라리넷을 불겠다고 가족들에게 말할 것이다. 그릇된 관계를 사랑이라 포장해서는 안 된다. 나를 버리고 공부만 하고 얻는 허울뿐인 행복은 결국 비극이 될 결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내 마음을 말해본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 이서현이 아닌 자유롭게 악기를 불고 싶은 이서현으로 당당히 엄마, 아빠 앞에 설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게 해준 책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악기를 불 때 나는 처음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악기들처럼 나도 나만의 소리로 세상에 설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아무도 모르지만, 지휘자의 마지막을 알리는 손동작과 함께 예쁜 소리로 여운을 주며 이 노래가 끝나길 바란다. 당연하게도 나는 나를 사랑해야 했지만, 책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아픈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너와 나의 노래를 위해 당연하게도 너는 너를 사랑해야하니까.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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