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치는 할머니' 본질은
우아함·아름다움이 아니라
죽을때까지 뭔가 배우고
일상 즐기고 감사하는 마음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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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변호사 |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아하게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어떻게 늙는 게 우아하게 늙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에 대한 나의 답은 '피아노 치며 늙어가는 할머니'다.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지는 않는데, 어렸을 때 갈망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했던 선망의 대상이 피아노라 그렇게 된 것 같다. 마흔이 훨씬 넘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긴 후에야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내게 '피아노 치는 할머니'는 아름답고 여유 있는 노년의 상징이다. 머리카락은 반백이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허리는 꼿꼿하고, 주름은 좀 있을지라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으로 클래식 소품을 연주하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멋진 화음으로 반주하면서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할머니.
그런데 그 이미지가 보기 좋게 깨졌다. 202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최고령 응시생 김정자(84) 할머니가 피아노를 더듬더듬 치는 영상을 보면서다. 먹고살기 바빠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는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손주까지 생긴 후에야 용기를 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해 고교 과정까지 다 밟고 수능까지 치러 지난 연말에 큰 화제가 되었다. 그 덕분에, 몇 년 전 한글날 특집으로 마련된 어느 방송에 어르신들을 위한 문해 교육 학교 학생으로 출연했던 할머니의 방송 영상이 다시 주목을 받아 나도 보게 되었다. 한글 배우는 내용이 주고, 피아노 관련 영상은 마지막에 나오는데 나는 그 마지막 부분에 꽂혔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영상에서 할머니는 잘 알려진 동요를 피아노로 친다. 악보대로 오른손으로는 '도레미미 파미레~ 레미파파 솔파미~' 멜로디를 치고, 왼손으로는 '도솔~시솔~시솔~도솔~'(C-G-G-C 코드 진행)로 아주 간단한 화음을 친다. 할머니의 등은 많이 굽어 있고, 손가락은 쭈글쭈글한 데다 뻣뻣하기 짝이 없다. 아주 쉬운 동요를, 그것도 네 마디 정도 치는데 음이 한두 번 이상 틀리고, 악보 보느라 멈칫거려 연주가 이어지지 않고, 암보(악보를 외워 치는 것)는 꿈도 못 꾼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내가 동경해 온 '피아노 치는 할머니'와 거리가 한참 먼데, 그 더듬더듬 피아노 소리가, 피아노 앞에 앉은 굽은 허리가, 건반 위에 얹은 뻣뻣한 손이 어느 피아니스트의 멋진 연주나 우아한 모습 못지않게 아름다워 보였다. 할머니가 피아노를 치기까지 사연을 알게 되어서다. 어린 시절 풍금소리를 들었을 때 '딸을 낳으면 음악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할머니는 손수건 한 개 자르면 3원을 받는 부업을 하면서 돈을 모아 무려 250만원 하는 피아노를 딸을 위해 샀단다. 그 피아노를 치던 딸이 출가해 미국에 정착하면서 피아노가 애물단지가 되었는데 너무 고생해서 산 피아노라 쉽게 팔 수 없었다. 그래서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를 찾은 것처럼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배워보고 싶어요, 이걸 갖고." 나이에 상관없이 배우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할머니, 어렸을 때 가슴에 품었던 음악의 아름다움을 50년도 넘게 지나 비로소 몸소 체험해 보는 할머니의 소망이다. '피아노 치는 할머니'의 본질은 피아노 소리 자체의 우아함이나 연주하는 곡의 아름다움에 있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뭔가를 배우고 소중하게 아끼고 일상을 즐기고 감사하는 마음임을 확실히 알겠다. 김정자 할머니처럼 '피아노 치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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