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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作 '비에 젖은 국어책'

2024-08-29

[제15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作 비에 젖은 국어책
〈게티이미지뱅크〉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화살처럼 땅에 꽂힌다. 이런 날이면 나는 책장을 들여다본다. 십 년 전부터 생긴 버릇이다. 책장에는 새로 출간한 두툼한 책들이 순서대로 나란히 꽂혀있다. 정연하게 진열된 첫머리에 크기를 자랑하며 보란 듯이 꽂혀있는, 물 얼룩이 져 있고 비닐 테이프로 땜질한 낡은 책 두 권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제자리를 잘못 찾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이 낡은 책을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꽂아놓고 보배처럼 모신다.

십 년 전, 그날도 비는 땅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며 많이 내렸다. 한 주에 한 번밖에 없는 재활용 수거일인데 분류해 놓은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또 한 주 동안 버려야 할 물건을 좁은 집에 놓아둘 수 없어 우비를 입고 쓰레기장으로 갔다. 아, 그런데 파지가 쌓여있는 더미 위에 한 무더기의 책이 비를 맞고 있었다. 어, 책이네. 누가 비 오는 날 책을 버렸지, 아깝게 다 젖어버렸네. 그래도 볼만한 책이 있을까, 뒤적여 보았다. '화법과 작문'이란 표지의 1~2권으로 된 고등학교 국어책이 눈에 띄었다. 순 간, 깊이 잠들었던 글쓰기를 배우려던 꿈이 벌떡 깨어나며 그 책을 덥석 끌어안게 하였다. 나는 빗물을 툭툭 털고 마른 옷자락으로 책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그리고 입고 있던 우비를 벗어 책을 싸안고 집으로 뛰어왔다.

온몸이 물에서 금방 건져낸 생닭 모양으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옷을 대충 갈아입고 책을 말리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두툼한 책을 말리기란 쉽지 않았다. 선풍기, 다리미 모두 동원하였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다 말리고 책장을 펼쳐보니 꼭 내 얼굴을 닮아 골판지 모양으로 패여 있었다. 구겨져 있건 말건 글씨가 똑똑히 보이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찢어진 곳은 투명 테이프로 붙였더니 새 책 못지않았다. 마음이 흐뭇해지며 웃음이 피어올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미련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서점에도, 도서관에도 책이 지천으로 쌓여있어 한 권 구매하거나 빌리면 될 것을, 그러나 나는 그때 한국에 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조상들이 살던 고국이라 하지만 낯설고 물설고 환경마저 다른 별천지 같은 세상에 어떻게 적응할까, 식구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부의 직책에만 충실하였다. 서점, 도서관, 책이란 단어를 머리에 떠올릴 여력이 없었다. 책은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선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컸기에 그것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 눈에 '작문' 이란 두 글자는 회색 안개가 자욱한 빗속에서 금빛으로 빛나더니 점점 커지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그 두 글자는 나에게 "글쓰기를 배워라, 글을 써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책에 집착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내가 중국에서 중학교 다닐 때였다. 인기가 있는 장편소설 한 권을 친구에게서 빌렸다. 빨리 보고 돌려줄 생각에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 읽었다. 읽다 읽다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아궁이 불이 다 꺼진 줄도 몰랐다. 끓고 있던 아침밥이 설익어 생쌀이 서걱거렸다. 제시간에 출근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다짜고짜 책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더니 아궁이에 쑤셔 넣고 불을 다시 지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가마솥을 다시 부글부글 끓어 올렸지만, 책은 하얗게 재가되고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친구들 속에서 책을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고 꿀꺽해 버리는 나쁜 아이로 소문 나 다시는 누구에게서도 책을 빌려보지 못했다. 책을 보고 있는 아이들 옆에 가서 기웃거리기만 해도 아이들은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책을 덮고 나를 피해 버렸다. 나는 어깨너머로도 책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따돌림까지 당하였지만, 책을 찢어 불태워버린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가슴 속에 꾹꾹 눌러놓고 털끝만큼 내색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 집에 책이라면 치를 떨게 하는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십여 년 위인 오빠가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급성 뇌막염으로 위독하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아직 떠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곧이어 날아 온 것은 "이미 사망. 유족이 일주일 안에 닿지 못하면 병원 측에서 매장 처리함"이라고 쓴 전보문이었다. 마른하늘에 내린 서리 위에 폭설까지 쏟아졌다. 오빠는 몇만 리 밖에서 유학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여객기도, 한 시간에 몇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급행열차도 없는 오십 년대 후반이었다. 모르는 길을 물어가며, 마차 타고 버스 타고, 완행열차를 몇십 번 갈아타고서도 열흘이 걸려야 도착할지 모르는 머나먼 길이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비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열심히 벌어도 오빠의 생활비를 한 달에 두세 번씩 나누어 보내는 형편이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대학생이 죽었다고 하니 온 동네가 울음바다로 되었지만, 누구나 손을 내밀 수 없었다. 광복을 맞은 지 십여 년이 지난 때라 모두가 넉넉지 못한 살림에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돈을 융통할 곳이 없었다. 직장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머나먼 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원에선 후사를 다 처리한 후일 테니 제발 헛수고를 하지 말라고 만류할 뿐이었다. 애간장이 녹아버린 아버지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 아직 철들지 못한 어린 자식이 매달리며 우는 것이 애처로워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나날이 얼마간 지났다. 식구들 모두 힘겹게 일어서려는데 우편으로 나무 상자 하나가 왔다. 그것을 뜯다 말고 아버지 어머니는 또 통곡하였다. 보내온 것은 책만 한 상자였다.

오빠 이름이 적힌 책을 보자 오빠를 잡아간 원흉이라도 잡은 듯이 어머니는 책을 때리고 또 때린다. "그 먼 곳으로 공부하러 보내지 않았더라면, 공부를 시키지 않았더라면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을. 이놈의 책이 원수야, 책이!" 하면서 오빠의 손때가 묻은 책을 끌어안고 울다가 쓰러졌다. 책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아픈 추억만을 남기었다. 배워야 할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문화 혁명'이란 문화의 근본을 뒤집어엎는 기나긴 터널 속에 헤매면서 좋은 책을 찾기 힘들었고 읽는 기회조차 잃고 말았다. 꿈에서도 공부하고 싶어 책가방을 메고 교문을 찾아 헤맸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꺼진 줄 알았던 문학의 불씨가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었던가, 지식에 굶주림이 극에 도달했는가, 빗속에서 젖어가는 책을 보자 칠십여 년간 숨어 있던 내 의식이 깨어났다.

보물 같은 책을 얻은 나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바늘 꽂을 짬이라도 있으면 들여다보았다. 책에 푹 빠져 굽던 생선을 숯으로 만들기를 몇 번인지 모른다. 책은 나를 서서히 글쓰기 길로 이끌었다. 수필이란 장르를 읽으면서 수필로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우리 조상들이 왜놈 등쌀에 정든 땅 버리고 낯선 불모지에서 나라 찾는 일에 바친 사연들을 내가 써놓지 않으면 영영 파묻혀 버릴 것 같은 사명감까지 들게 하였다.

배우면서 그렇게 피를 토하듯 쏟아낸 내 글이 고희의 중간역에서 드디어 문학지에 실리게 되었다. 올해에는 그동안 써온 글들을 모아 '고향의 무지개'란 제목으로 수필집 한 권을 출간하였다. 책은 나를 만년에 작가의 길로 인도하였다. 하늘은 계속 비를 뿌리고 있다. 내 책 속에 있는 문자들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다닌다. 불 속에 버려진 소설책의 어휘들이, 오빠의 손때묻은 전문 서적의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 울울창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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