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윤 논설위원 |
"난 말이야, 당신 안 보면 못 살 거 같아. 잠도 안 오고 아무것도 먹히지도 않고. 숨을 못 쉬겠어. 여기가 막혀서 살 수가 없어." 영화 '인간중독'에서 김진평 대령(송승헌 분)이 부하의 아내인 종가흔(임지연 분)에게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진수(眞髓)가 녹아 있는 명대사라고 생각한다. 김 대령은 종가흔에게 "안 보면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웬만하면 남자의 이런 말은 안 믿는 게 좋다. 대부분 작업성 멘트거나 과장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김 대령의 사랑고백은 진심이었다. 상사병에 걸려 죽지 않겠다는 듯이 무슨 짓이든 하려고 했고, 그렇게 했다. 불륜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 대령은 진짜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 그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건 자신의 욕망과 집착이었을 뿐이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정서적, 육체적 쾌락에 중독된 것이다. 모든 중독이 그렇듯, 김 대령이 호소하는 고통 역시 전형적인 금단 증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다. 강렬한 자극에 끌리고, 반복된 자극에 익숙해지면서 더 강한 자극을 갈구한다. 이것이 중독의 시작이다. 현대 물질문명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교묘히 이용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며, 소비를 미덕으로 포장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쾌락과 중독 시스템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 문명의 발전은 중독의 대상을 다양화한다. 술과 음식에서부터 도박, 마약, 섹스,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중독 목록은 길어진다. 특히 첨단 기술 발달로 인간의 욕구가 쉽고 빠르게 충족되면서 중독은 심각한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딥페이크 음란 영상물 사태는 중독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얼마 전만 해도 AI(인공지능) 기술을 악용한 딥페이크가 이토록 파괴적일 거라곤 대부분 예상 못했다. 사실 딥페이크 음란물은 예전의 인터넷 포르노와 차원이 다르다. 지인이나 유명인의 얼굴을 도용해 실제 인물인 것처럼 만든다는 건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섬뜩하다. 피해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고 사회적 윤리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기에 결코 용서해선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변태들 중에 청소년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경찰이 적발한 딥페이크 음란물 범죄자의 40%가량이 10대다. 이들은 유명 연예인뿐 아니라 아동까지 범죄 표적으로 삼았다. 일부는 딥페이크 음란물을 수천 장 판매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싹수가 노란 정도가 아니다. 10대때 저지른 성범죄 수준이 이 정도인데, 자라서는 어떤 괴물이 될지 걱정이다.
딥페이크 음란물을 일부 변태들의 일탈로 치부해선 안 된다. 우리사회 상당수도 잠재적 가해자나 피해자다. 단지 AI기술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유독 한국에서 딥페이크 음란물이 많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왜곡된 성(性) 문화와 땅에 떨어진 윤리의식의 결과물이다. 물론 이 같은 성범죄를 막으려면 제도적 보완과 처벌 강화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사회가 온갖 중독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다. 중독사회의 최대 피해자는 청소년이다. 미국, 유럽처럼 우리도 미래 세대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일에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
허석윤 논설위원
허석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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