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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속의 프랑스, 생말로…대서양과 마주한 중세의 성벽도시

2024-11-01

해적 침입 방어 위해 성벽 건축
성 내부에 자연스레 마을 형성
직사각형 모양 도시 감싼 성곽
그 위로 아름다운 풍광 산책길
석조 건축물 묵직한 느낌 매력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속의 프랑스, 생말로…대서양과 마주한 중세의 성벽도시
생말로 성벽 도시. 해적의 침입이 잦아 12세기 방어를 위해 성벽을 쌓았다. 성곽을 따라 마을이 좁은 도로로 연결돼 있다.
"나에게 일주일간의 삶이 남았다면 생말로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다."

'인간의 조건'으로 유명한 앙드레 말로의 말이다. 실제로 생의 마지막 일주일을 생말로에서 보내진 않았지만 한 인간의 위대함은 죽음을 맞는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했던 그가 죽음을 상상하면서 그렸던 도시가 생말로다.

생말로는 4만6천여 명(2017)의 인구를 가진 프랑스 북서부 지역의 작은 항구 도시다. 노르망디와 인접해 있지만, 행정구역으로 보면 브르타뉴 주에 속한다. 브르타뉴는 프랑스에서 가장 지역색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 살던 켈트족이 이곳에 정착해 뿌리를 내렸고, 939년에서 1547년까지는 독립국인 브르타뉴 공국으로 존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고유 언어인 브르타뉴어도 남아 있다. 프랑스 속의 또 다른 프랑스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생말로는 브르타뉴 지역 중에서도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브르타뉴 공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이곳 사람들은 "나는 프랑스 사람도, 브르타뉴 사람도 아니다. 나는 생말로 사람이다"라고 외치며 독립공화국을 선언하기도 했다.

도시의 형성은 6세기 무렵 영국 웨일스 출신의 주교 세인트 맥로(Saint Maclow)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그는 7년간의 긴 순례 중 만난 아름다운 바다 마을에 반해 이곳에 정착했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그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해적의 침입이 잦자 12세기에 방어를 위한 성벽을 건축했고, 자연스럽게 성 내부에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과 같은 성벽 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도시를 감싸고 있으며 성곽을 따라 마을이 좁은 도로로 연결돼 있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속의 프랑스, 생말로…대서양과 마주한 중세의 성벽도시
생말로 성벽 산책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길이 펼쳐져 있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속의 프랑스, 생말로…대서양과 마주한 중세의 성벽도시
생말로 성문. 해적을 막기 위해 두꺼운 성벽까지 쌓은 생말로는 역설적으로 '해적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해적을 막기 위해 두꺼운 성벽까지 쌓은 생말로는 역설적으로 '해적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실제 15세기 이후 이 도시에는 켈트족 출신의 해적들이 수없이 많았다. 이들은 16세기 이후에 아예 프랑스 왕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인 해적 활동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은 이들을 소탕하려고 했지만, 워낙 세력이 강해 토벌 대신 그들을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해적을 막으려 쌓은 성벽이 해적의 차지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적으로 피해를 보았던 도시가 해적의 본거지가 되면서 해적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해적들로부터 골머리를 앓던 영국군과의 전쟁도 잦았다. 지금도 도시의 상징처럼 성곽 입구에는 해적선이 정박해 있고, 요새 위에는 대포가 바다를 향해 포문을 열어놓고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이 잦았던 생말로는 2차 세계대전의 전화도 피해갈 수 없었다. 독일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자 1944년 8월 연합군이 폭격을 가해 도시의 80% 이상이 파괴됐다. 이후 30여 년간의 재건작업을 통해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생말로 시내 곳곳에 과거의 모습과 복원된 모습을 비교한 사진들이 걸려 있어 당시의 참혹함을 되새기게 한다. 이처럼 생말로 시가지는 최근에 복원된 모습이다. 그러나 생말로 성이 만들어내는 중세의 성벽 도시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몽생미셸과 함께 브르타뉴의 양대 관광지로 꼽히고 있다.

나의 브르타뉴 여행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어느 언저리에서 만났던 영화 '라스트 콘서트'(1976)가 이끈 여행이었다. (우습게도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가 이탈리아 영화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이 영화의 중요 배경지가 바위섬 위의 수도원 마을 몽생미셸과 성벽 도시 생말로였기 때문이었다. 몽생미셸을 나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영화의 OST를 계속 흥얼거리며 20분 남짓 차를 몰았나 보다. 영화의 또 다른 배경지 생말로의 거대한 성벽이 나타났다.

주차장과 관광안내소가 있는 생뱅상 문이 성의 주 출입구이다. 돌의 견고한 질감이 그대로 드러난 성벽은 세월을 견뎌낸 듯 매끈하고 우아했다. 문을 들어서 오른쪽으로 돌자 생뱅상 성이 나타났다. 이곳은 현재 시청사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고, 일부는 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앞쪽으로는 거리를 따라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몽생미셸의 중심가 그랑뤼가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면 이 거리는 제법 규모도 있고 근사했다. 역사가 적층된 과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다른 도시들처럼 성벽 안의 구시가지도 광장을 중심으로 주요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 특히 성당을 중심으로 짙은 색의 석조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묵직한 느낌은 성벽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이었다. 이름난 명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거리 분위기를 음미하는 여행으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 가는 대로 들어간 기념품 가게의 풍경도 이채로웠다. 기념품마다 해적과 관련된 문양이나 상징 등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해적을 마케팅하는 도시가 어디 있으랴.

생말로의 상징은 거대한 성벽이다. 중세에 건축된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도시를 감싸고 있고, 다닥다닥 붙은 회색빛 지붕들이 성곽을 따라 마을을 만들며 좁은 도로로 연결돼 있다. 성벽 위에는 산책로라고 불러도 될 만큼 적당한 길이와 폭,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길이 펼쳐져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 두 대가 동시가 지나갈 수 있다는 바빌론 성벽만큼은 아니지만 2㎞나 되는 길이에 수레 한 대는 충분히 다닐 만큼 폭도 꽤 넓었다. 앞에는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요트가 즐비한 성곽 앞의 봉스크루 해안은 16세기에 현재의 퀘벡과 몬트리올 등 캐나다 지역을 개척한 자크 카르티에가 배를 띄웠던 곳이다. 그는 생말로에서 태어났고, 생말로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캐나다라는 나라 이름도 그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퀘벡 지역의 원주민 추장이 '마을'이라는 뜻의 원주민 언어 '카나타(Kanata)'를 이곳 지명으로 오해한 것이다. 해안가에는 18세기 파리조약에 의해 퀘벡이 영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퀘벡공원도 있다. 공원에는 바다를 향해 손짓하는 요베르 쉬르쿠프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8세기 말 나폴레옹에게 밀지를 받아 영국의 무역선을 약탈했던 해적이다. 해적인데도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았고, 이 공원에 그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언젠가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리라. 이곳에는 또 4년마다 카르티에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수많은 캐나다인이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축제를 즐기러 온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봉스크루 해변 가장자리에 길게 늘여 놓은 참나무 기둥인데, 이것은 파도에 성벽이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방파제이다. 봉스크루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바다 바로 앞에는 바닷물을 가둬 만든 인공수영장도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해변 특성상 썰물 때가 되면 사라지는 관광객들을 묶어두기 위해 1936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해변에는 또 두 개의 섬이 있다. 오른쪽 섬은 1608년에 축조한 프티베 요새이고, 왼쪽은 프랑스의 대문호 샤토 브리앙이 잠들어 있는 그랑베 섬이다. 썰물 때는 두 섬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다. 샤토 브리앙은 빅토르 위고가 '샤토 브리앙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닮고 싶지 않다'고 했던 롤모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가 돈에 눈 멀어 노예매매 등 부도덕한 짓을 자행하는 동안 샤토 브리앙은 생말로의 바닷가에 방치돼 낮에는 들판을 쏘다니다가 저녁에야 덩그런 저택으로 돌아오곤 했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와 종탑의 우울한 종소리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신을 달래 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누나 루실은 젊어서 죽었고, 백작의 지위까지 오른 아버지는 죽어서 혁명군에 의해 묘가 파헤쳐졌으며, 형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그 역시 왕정파의 일원으로서 두 번의 장관직과 세 번의 대사직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혹독한 망명 시절을 보냈다. 1848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루이 16세 치하,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치하, 왕정복고 등의 극심한 변화 속에서 정치가로, 작가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프랑스 속의 프랑스, 생말로…대서양과 마주한 중세의 성벽도시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그래서 그런가. 생말로에서 나고 자란 그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그 외엔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는 묘비명을 남겼다. 그는 죽어서 묻힐 때도 누운 자세가 아니라 선 자세로 묻혔다고 한다. 그가 영원히 바다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죽어서나마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만 들으며 조용히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작은 회색 돌로 만든 십자가가 세워진 그의 무덤은 그의 일생만큼 쓸쓸했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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