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짐을 체감할 수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는 경제적으로 상대적 풍요함을 느낀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의 물가가 한국과 큰 차이가 나서 쉽게 외식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삼성이라는 기업브랜드가 일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유럽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한국이 경제발전을 통해 국력이 점차 성장함과 동시에 BTS, 블랙핑크, 뉴진스, 오징어게임, 노벨문학상 작품 등 우리의 문화콘텐츠가 세계 문화산업시장을 누비고 있어, 이제는 소위 '국뽕'에 취할 정도다.
K-문화콘텐츠가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자랑스러운 전통문화가 있다. 예를 들면 제례나 족보 같은 것에 담겨있는 정신문화이다. 다만 외국인들이 그것을 K-POP이나 K-드라마처럼 알지 못할 뿐이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삶의 방식이 바뀜에 따라 전통적 제례 문화도 과거의 방식과는 그 형식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방식이나 법도가 현대사회에 맞게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족보' 문화 역시 한국사회의 위대한 유산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문화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누구나 본관이 있고 시조가 있다. 외국 어느 나라에도 왕족을 제외한 일반 서민 집안이 가계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나 유럽의 귀족도 왕족이 아닌 이상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들의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그 행적조차 알지 못한다. 소위 근본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다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도 그 근본을 잃지 않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했고, 결국 선진국이 되었다.
과거 프랑스의 스페인 문화원에 근무하던 스페인 직원과 우리 집안의 족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왕족이나 귀족으로 오해를 받은 일도 있다. 요즘은 이러한 전통문화에 대한 보존과 계승에 관심을 가지는 문중이나 개인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제례 문화도 조선전기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6품 이상의 관직자들만 3대를 사당에서 제사 지내고 7품 이하와 서민들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하였다가 조선 말기 상놈 소리 듣기 싫고 가문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4대 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이런 제례라는 전통문화의 형식이 근래에 간소화되거나 생략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근본정신은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조상 제사의 근본정신은 성신충경(誠信忠敬)을 통한 효의 마음이다. 부모에 대한 효가 거슬러 올라 조상에게 닿는 것이며, 효가 인간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뿌리에서 나오는 정신문화는 우리의 정체성과 윤리를 지켜주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재산문제, 의견충돌 등으로 패륜을 저질렀다는 기사를 볼 때면 한국사회의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느낌을 받는다. 과거에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 타인을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존속을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했다. 학생이 선생님을 무시하고, 젊은이가 노인을 막 대하고, 형수에게 욕설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타인을 존중할까. 이제는 길에서 학생들을 훈육하는 어른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모의 위법을 알고 신고해야 할지 숨겨줘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도 없어질 것 같다. 뿌리가 말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 존중, 자유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더불어 보편적 가치를 실천하는 나라마다 우수한 전통적 가치도 보존되기를 바란다.
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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