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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시론] 영남일보와 계엄의 추억

2024-12-11

[영남시론] 영남일보와 계엄의 추억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11일 새벽 12시30분,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감격이었다. 한강이 자신의 책을 읽을 때 '작별하지 않는다'를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해 한 달 전 '소년이 온다'를 함께 샀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단숨에 독파하고, '소년이 온다'는 반쯤 읽다가 책을 덮었다. 너무 아프고 생생해서다. 둘 다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비상계엄하 민간인학살을 정면에서 다뤘다. 전자는 제주 4·3과 1950년 6·25전쟁 전후 대구형무소에서의 보도연맹원까지, 후자는 광주시민이 학살의 대상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앵무새, 눈, 파도 같은 사물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과 학살의 잔인성을 그려냈다. 읽다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소설 속 인선의 어머니가 선친이 희생된 채영희 <사>10월항쟁유족회장과 오버랩됐다. 그의 조부는 독립지사 채충식 선생이다. 경북지역학살피해자유족회장은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독립운동가 몽재 이원식 선생이고, 부회장 이용로 선생은 경북지역 반민특위 위원이었다. 이용로의 동생 봉로 역시 독립운동가로 서훈받았으며 조부 이현주 역시 애국계몽운동가다. 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사정권 비상계엄하에서 몽재 이원식은 사형, 이용로는 15년형을 억울하게 선고받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구상한 시점이 2004년이라고 했다. 2003년 나는 대구 10월과 보도연맹사건, 6·25전쟁 전후 대구에서의 민간인학살을 기획취재했다. 앞서 사진기자 시절 경산코발트광산 학살 현장을 본 건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전까진 언론은 이를 자세히 다루진 않았고 한강의 소설에서처럼 언론이 34년간 침묵하거나 애써 외면한 것이 사실이다. 소설 속 인선 어머니가 상자 안에 보관해온 신문 스크랩 기사는 '1960년 7월28일 E일보'다(p 256). 영남(YEONGNAM)일보는 Y를 이니셜로 쓰는데, Y 다음이 E다. 혹시 영남일보가 아닐까 싶어 1960년 4·19 이후 pdf지면을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남일보는 60년 5월25일부터 다음 달 중순까지 본사 기자를 영천, 포항, 영덕, 상주 등지에 특파해 학살 현장을 취재했다. 이어 '10년 후의 증언(양민학살 사건의 유족들)'이란 타이틀로 연재하고, 계속해서 한 달간 사회면 톱으로 사진과 함께 당시 상황을 줄기차게 보도했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열악한 당시 현장을 찾아 진실과 사실 보도를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은 선배 기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1980년 5월 또다시 내린 전두환 군사정권의 비상계엄에서 대구경북지역 언론은 대령 1명, 중령 1명, 대위 4명으로 구성된 언론검열단과 보안사에 의해 철저히 간섭과 통제를 받았다. 결국, 그해 11월25일 영남일보는 강제폐간되고 기자는 강제해직됐다. 이렇듯 비상계엄에선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억압되고 민주주의는 조종을 울린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처음이자 마지막 계엄이었고, 독일은 나치 정권 몰락 이후 계엄은 사라졌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3일 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온 국민이 불면의 밤이다. 전시도 아닌, 전시상황도 아닌 시점에 벌인 친위 쿠데타였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시국은 오리무중이다. 분명한 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대통령과 함께 공모하거나 동조·방조한 집단은 반민주주의의 공범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하루빨리 결자해지하라.

박진관 중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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