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
영화 '하얼빈'을 관람한 것은 사소한 감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은 혹독한 추위와 감기 탓에 늘 즐기던 산행조차 포기한 날이었다. 담요를 덮어쓴 채 TV를 켜자, 17년을 함께한 TV가 그날따라 지쳤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지루한 부팅 시간을 달래려고 옆에 놓인 붉은 용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무채색 같던 하루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럴 땐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튕기듯 일어나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고민 없이 들어선 영화관에서 상영작을 빠르게 훑었다. 순전히 시간을 때우려는 즉흥적인 선택이었지만, 나는 이런 선택을 가끔 즐긴다.
그렇게 영화 '하얼빈'과 마주쳤다. 스크린에 펼쳐진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회고를 넘어 현재성을 확보하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선택한 영웅이었고,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리더였다.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결단력과 리더십은 역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에 닿아, 다시 내일로 이어지는 콘텐츠로 생성되었다.
영화 '하얼빈'은 얼음 위에서 시작해 얼음 위에서 끝났다. 광활한 얼음 호수, 무질서한 수천 갈래의 빗금이 수미상관성으로 묵직한 스토리를 완결시켰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롤이 오르는 동안 서서히 조명이 밝아왔다. 사라지는 관람객들 뒤로 내게 남은 여운은 깊은 울림으로 굳어 갔다.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 그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우리 역사가 말해주는 진실을 그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조선이란 나라는 수백 년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다.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하얼빈' 속 이토 히로부미의 대사는 그때의 현실을 직시함과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은 단순히 조선의 현실을 비꼬는 데 그치지 않았다. 조선의 혼란한 시기에도 민중은 단합과 희망의 상징적 존재로 굳건했으며,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늘 대한민국의 정신으로 깊숙이 전달되고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반복이나 정체된 기록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양상에 따라 새롭게 쓰인다. 역사가 생물이라는 이유다. 영화 '하얼빈'은 어제의 안중근 의사의 삶과 선택을 통해 오늘 우리 삶의 방향을 묻는다. 안중근을 시대의 틀에 가두지 않고, '하얼빈'은 소환해내었다. 하얼빈역. 그날의 총성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했음을 선명히 보여주었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의 총성. 뤼순 감옥.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소환해 본다. "내가 죽더라도 동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을 완성하라!" 그는 민족의 단결과 희망을 강조하며 목숨을 바쳤다. 작금의 현실 역시 의식 있는 태도가 절실한 때다.
이향숙 (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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